에피소트 11

설매

몽고의 처녀가 길을 떠난다. 황제가 사는 곳은 남쪽이어서 이런 눈 구경을 했을 리 없다. 그러면서 춘절 아침 눈을 담아서 그 속에 어미의 소원도 함께 담아서 황제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선다. 씨라무렌 초원에서 거기까진 반년 넘는 길. 황궁에 이른 것은 하지 이맘때. 홑몸으로 그 먼 길을 어찌 갔을까 - 나는 황제를 만나야 한다. 들일 길 없는 수문장이 물리길 사흘. 마침내 氣도 다하고 脈도 다하여 꽃잎처럼 가벼워진 몸위에 거적이 덮였는데 때 마침 시모작을 마치고 환궁하는 황제에게 이르렀다. -초원의 눈을 담아 황제께 바칩니다. 눈은 이미 녹아 물이 된 지 한참이었으나 -달구나 그러면서 황제는 녹은 물을 다 마셨다. - 너의 무슨 염念이 먼 길을 나서게 하였는가 - 어미는 낙마를 한 뒤 누워 지내는 데 남..

에피소트 2011.02.11

방글이 할아버지

아이들은 외할아버지를 방글이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렇게 부르면 못쓴다며, 외할아버지라고 가르쳐도 유독 큰딸애가 그렇게 부르길 좋아한다 오늘도 제 아빠가 미술교습소에다 차를 대마~ 하였을 때도 "방글이 할아버지한테 가게?" 그러면서 눈치는 보였던지 나를 피해 제 방으로 얼른 가고 만다. " 놔둬요. 나이가 들면 그렇게 부르라고 해도 안 부를 거야 " " 당신도 참 " 그렇게 남편은 태평해 한다. 아이들이 외할아버지를 방글이 할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그 웃음 때문이다. 이렇게 해도 빙그레, 저렇게 해도 빙그레. 마구간에 누렁이 황소를 아이들이 신기해하며 아빠소냐, 엄마소냐고 물어도 그저 빙그레 웃고 만다. " 소는 아침저녁 두끼만 먹는단다. 그러니 이 이상 더 크질 않아. 우리 유나는 세끼 꼬박꼬박 먹어서 ..

에피소트 2007.03.19

낙타와 사막초

우리가 하는 일은 횡단도로를 뚫는 것이었다. 그곳은 황량하기 짝이 없는 산악도시로 이어지는, 왕국 같은 도시였다. 그러기를 6년. 마침내 도로가 뚫렸을 때 전기도 같이 들어갔다. 전기에 자동차, 이제 이곳에도 신천지가 열린 것이다. 그 일을 해낸 우리에게는 귀국이라는 티켓이 주어졌다. 그러나 도로와 함께 찻길이 열림으로써 이 곳 베두인 족장의 걱정은 다른데 있었다. 그 동안은 낙타만이 운반수단이었는데, 이제 도시로부터 짐을 싣고 오갈 일은 없어진다. 그가 가진 수 십 마리의 낙타가 문제가 되었다. 준공행사가 있던 날, 본사에서는 텔레비전 수신기를 보내왔다. 족장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암수 낙타 한 쌍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이것을 가지고 가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어떻게 운반해 갈 것인가. 우리는 걸프전으..

에피소트 2007.03.19

되돌아 온 봉투

영장이 나왔다. 남편은 아들을 불러들여 기어이 군복을 입게 만들었다. 호주로 유학을 보낼 때는 영주권이 보장되어 있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군대로 보내는 모정은 이 땅에 사는 어머니들 밖에 모른다. 그런데 유독 내 가슴앓이가 심한 것은 단 하나. 그 이가 입원에 입원을 거듭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암의 전이를 우리는 남편에게 알리지 않았다. 예전 같지 않게 피곤해하며 짜증까지 더해 가는 것을 받아들이는데 3년이 걸렸다. 그 사이에 강원도로 가 있는 아들은 올 10월이면 병장이 된다. 아들의 진급이 더할수록 남편은 헤어나지를 못하였다. 연가까지 당겨썼다. 특별외출도 여러 차례. 이제 작별의 시간이 가까워왔음을 남편도 알았다. 아들은 제 아빠 곁에서 밤을 보내며 나 모르는 부자간 이야기도 나눌 시간을 가..

에피소트 2007.03.19

아내의 우산

일찍 퇴출을 당한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얼마간의 목돈을 기대하며 함께 사직을 당한 우리는, 힘내라...반드시 일어설 것이다...해 가며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가졌다. 일종의 정보교환 같은 것이었는데, 시간이 가면서 그것마저 시들해진 지 오래 되었다. 집에 있는 날이 많아지면서 집사람과 역할교환을 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이러다가 반상회에서 살림 비결을 강의하는 것 아니유?“ 냉장고속 찬기에다 이것은 [쌈장] 저것은 [초고추장]하며 물목을 적어 놓아두자 아내는 우회적으로 내 세심함을 꼬집었다. 차츰 복직은 멀고 창업은 엄두도 못내며, 말 수가 적어진 우리 사이를 파고 든 것은 강아지였다. “네가 더 좋아하는구나” 주중 휴일 오후, 우리는 강아지를 데리고 동네 야산으로 산책을 나섰다. “..

에피소트 2007.03.19

하늘나라로 가는 꿈

금년 동창회는 뭔가 특별한 행사를 꾸며보고 싶어했습니다. 단체로 해외여행을 하면 근사할 것 같다는 제안도 있었습니다. 지난해처럼 하되 이번에는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모시자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나는 다른 말을 했습니다. - 학생 수를 채울 수 없어 내년에는 문을 닫게 될지 모른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모교에서 하는 것이 어떻겠어?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았습니다. 반마다 60명이 넘는 학생들이 3반이나 되었는데 문을 닫는다니, 개교 100주년을 앞두고 문을 닫는다니, 그들은 학교에서 열자는 내 말에 동의를 해 주었습니다. 우리 집은 학교 앞에 있었습니다. 짜장면 집 아주머니도 이발사 아저씨도 나를 책방집 딸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는 미장원 2층에 있는 사진관에 자주 가곤 했는 데 거기엔 흑백사진에 ..

에피소트 2007.03.19

태백으로 가는 길

휴가철이 지나서야 여름휴가를 받았습니다. - 차라리 당신끼리 해외라도 다녀오는 게 나을 뻔했어. - 됐어요. 아내는 병원일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서도 이번에도 반쯤은 부어 있었고 아들은 제 친구끼리의 수련회를 놓친 것을 애써 감추고 들었습니다. - 태백으로 가자. 나는 아이에게 반딧불이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어느 해보다도 많이 쏟아지는 별똥별을 감상하기에 태백만큼 좋은 곳은 없을 듯했고 거기에 또 하나, 나는 수인선水仁線의 협궤열차挾軌列車속으로 들어가 30년 전의 아내를 떠올렸습니다. . - 이 열차도 머지않아 폐쇄가 된다고 한다. 그래 태백으로 가자. 타고 내리기를 거듭하는 현지주민들 속에서 우리 가족은 조금씩 자연 속으로 빨려들기 시작했습니다. 논과 밭 그리고 나직한 산들로 채워진 단조로운 풍경이었지..

에피소트 2007.03.19

인터넷의 힘

22년을 다닌 직장을 그만 둔 것은 나이 때문이었습니다. 말이 명예퇴직이지 결코 명예롭지 않은 퇴직. 그래 이제부터는 내 인생을 산다. 마음을 다그쳐 먹고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1톤 트럭을 사는 일이었습니다. 야채장사라도 하면 설마 처자식 굶겨 죽일까. 사무실에서 부아가 치밀 때면 입버릇처럼 동료에게 해대던 말이 세상에 나와 보니 하나도 쉽지 않았습니다. 요령 없이 사들인 열무는 쉬 시들고 상추는 짓무르기 일쑤였습니다. 아무 동네나 돌아다닐 수도 없었습니다. 대단지 아파트나 목좋은 곳은 이미 임자가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자연히 없이 사는 동네를 상대로 돌아다니던 일도 잠시, 그만 좁은 골목에서 사고를 낸 것입니다. 내일은 세 번째 월부금을 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화근이었습니다. 오래된 보안등이 힘..

에피소트 2007.03.19

어머니의 초상

해방후 한적한 시골 초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읍사무소에 다니는 건실한 청년을 남편으로 맞아들일 때만해도 그녀의 삶은 평온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6.25사변은 그녀의 운명을 하루아침에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쫓고 밀리는 공방이 계속된 가운데 공습을 맞은 것입니다. 남하하는 북한군을 이쯤에서 저지시키고자 했던 모양입니다. 거대한 B-29에서 쏟아 붓는 폭탄에 건물이 무너지고 철로가 절단 나기 시작한 것은 순식간이었습니다. 기차역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녀가 무엇인가 번쩍 하는 것을 본 그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옆에 있던 남편이 그만 소이탄燒夷彈에 휩싸이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눈앞이 캄캄한 것은 바로 그녀 자신 때문이었습니다. 병원에서 끝내 실명을 맞이했을 때 그녀에..

에피소트 2007.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