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화기행

[중국문화여행] 2001 낙양의 용문석굴과 백거이

강정순 2006. 4. 14. 12:43

낙양시 남쪽 13Km,

이허伊河의 양쪽 벼랑에 석굴이 뚫려있다.

강이 산을 둘로 나누었는데,

동쪽 산이 香山이고

서쪽의 산이 龍門山이다.

강은 흐르다 멈추는가 싶은 伊河.

81번 버스에서 내려서면 강을 사이에 두고

용문석굴과 백거이의 유적이 공존한다.

北魏가 다퉁大同에서 洛陽으로 천도를 한 것은

1,500년 전 일이다.

대동에는 雲崗石窟을 만들었는데

낙양으로 옮기고 나서도

그 외곽인 龍門에 석굴사원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용문석굴은

윈강 석굴의 결정판에 해당한다


 

 

 

龍門의 돌은 단단하다.

그래서 조각이 가능한 것이다.

鳴沙山에 있는 둔황의 돌은

깨지기 쉬워 석불을 만들 수 없었다.

대신 벽화를 그리고

다른 곳에서 불상을 만들어 와야 했다.

용문이 둔황과 다른 것은

산에 있는 돌에 불상을 실제로 새겼다는 점이다.

그 대신 둔황처럼 화려한 벽화는 없다.

둔황이 중국회화의 보고라면

용문은 중국조각의 寶庫라할 수 있다.

 

용문의 대표적인 걸작은 奉先寺.

이 곳 최대의 석굴. 비로자나 불상은

높이만 17m가 된다.

則天武后를 본 떠 만들었다는 소리도 들린다.

그 시대에는 용문에서 석굴을 만드는 전성기였다.

8세기 玄宗에 이르러서는

점차 불상을 만드는 일이 드물어졌다.

그 무렵에는 西山의 벼랑이 석불로 가득 차,

더 이상 조각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종 때는 東山에 석굴을 만들었다.

香山이라 일컫는 동산에서 은거하면서

말년을 보낸 白居易

용문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을 만큼

龍門香山寺는 부르면 소리가 가 닿는다.


 

 

 

건너편 香山寺 아래쪽에 바이위엔白園이 있다.

작은 정원인 이곳은

白居易의 무덤이 있는 곳이라 해서 찾아갔다.

그는 용문의 풍경을 사랑했다.

18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낙양에서 살며 불교에 심취하여 향산사에서 지냈다.

그런 뒤 자신이 아끼고 좋아했던

용문의 향산에 묻혔다.

묘지의 지형이 비파를 닮았다하여

琵琶墓라 부른다는 데

이것은 그가 쓴 '琵琶行'에서 따온

牽强附會견강부회같이 보인다.

白公祠香山九老臺라 불리는 곳이다.

백거이는 만년에 낙양의 아홉 노인과 더불어

賦詞吟詩부사음시하며 보내는데,

'尙齒會'상치회라 하여 이들의 평균 연령이 74,

그 중 李奭이석은 136세였다.

 

 

白居易는 그의 를 넣어

白樂天으로 더 알려진 인물이다.

이백 두보와 함께 당나라 3대 시인인 그는

'長恨歌''琵琶行'으로 더 사랑 받는 시인이다.

'술을 마시려는 데 비파도 없다'擧酒欲飮無管絃

탄식했던 그의 무덤에

잔술도 붓지 못하고 말았으니

이런 노릇이 다시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