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화기행

[중국문화기행] 2001 맹자묘와 공자묘

강정순 2006. 4. 14. 12:42

620.

취푸曲阜로 가기 위해 옌저우兗州로 가는 特快를 탔다.

공묘와 맹묘가 그곳에 있다.

山東省은 우리와 낯설지 않다.

華僑화교의 대부분이 산동성 출신이며

우리가 먹는 중화요리들도 여기 음식이 많다.

곡부에서 남서 25Km 떨어진 곳에 츠센鄒縣이 있다.

지금은 鄒城市Zoucheng.

벌판으로 곧게 난 길을 가다보면

왼편으로 공자Confucius故里가는 이정표를 만난다.

鄒城市에서 20리 거리다.

더 가다보면 우측에 멍즈꾸리孟子故里가 보인다.

어디를 둘러봐도 끝없는 벌판이다.

흙벽돌로 지어진 집은

그 당시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 터에 노나라가 자리했다.


 

 

 

 


푸춘이란 이 마을은

孟母三遷之敎맹모삼천지교와 관계가 있다.

그러나 맹모가 이사를 했다는 시장은

지금의 츠센鄒縣역 부근이다.

그는 戰國시대

공자에 버금가는 亞聖아성으로 자리했던 인물이다.

맹자를 모신 사당 즉 孟廟맹묘는 찾기가 쉽지 않다.

상점과 주택에 연해 있어서다.

한가로움이 가득한 곳,

천년 묵은 향나무들이 맹자의 혼을 품어 안고 서있다.

백로들이 분칠하듯 싸버린 마른 똥 자국이

향나무를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해 놓았다.

 

산동성의 명승지는 曲阜三孔과 타이산泰山을 친다.

三孔이란 공자를 모신 사당孔廟,

공자의 집孔府,

공자와 그 가족의 묘孔林를 말한다.

중국하면 유교를 빼놓을 수 없고

유교하면 공자를 떠올리게 된다.

그만큼 우리에게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논어]는 실상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다.

그가 능력을 발휘한 것은 50이 되어서다.

그것도 잠시,

14년 간을 유랑으로 보내다가

고향에 돌아온 것은 그가 69세나던 해.

돌아와서는 오로지 제자들을 모아 교육에만 힘쓴다.

아들 제자인 顔回안회와 子路

그가 74세로 죽기 전에 먼저 죽었다.

공자가 죽은 지 1년 뒤에

나라 哀公이 묘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작은 규모였지만

前漢전한 시대에 유교가 국교가 되면서

규모가 늘어났다.


 

 


前門에는 至聖林坊지성림방이 나타나고

이어서 떡갈나무와 향나무길이 길게 이어진다.

洙水橋를 지나면

[子貢植樹檜]자공식수회라는 작은 비석이 하나있다.

자공이 심었다는 회나무로

1m 남짓한 관솔만 남아 있다.

먼저 子思의 묘(Kong Ji's Tomb孔伋墓)가 나타난다.

그 앞에 [孔子之孫 作 中庸]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아들을 데리고 손자까지 안아주는 형국으로 배치된

공자묘 (Confuciu's Tomb)

둘레석 위에 흙으로 봉분을 해 놓았다.

잔디도 아니다.

잡초더미속에 구기자 새순이 성글게 나 있어서

볼썽사나웠다.

다만 [大成至聖文宣王墓]라는 비석이 아니었다면

묵혀진 무덤쯤 아니겠는가.

공묘의 오른쪽에 아들인 孔鯉(Kong Li's Tomb)의 묘가 있다.

아들의 이름은 공자의 고향마을 리에서 따왔다.

원형으로 둘레석을 한 후

그 위에 흙으로 봉분을 한 모양은 같다.

공자가 죽자 모든 제자들이

3년 간 守墓수묘를 하다가 떠났다.

오직 자공만이 6년 간 공자묘를 지켰다.

묘 왼쪽에 작은 집이 하나 있는 데

그 앞에 [子貢虞墓處] ZiGong's Hut라는 표지석이 있다.

顔回안회의 묘도 이 부근인데 찾지를 못하고 나왔다.

조용한 고궁을 나선다 싶은 기분은

이내 지워져버린다.

상인들 속을 빠져나가는 것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