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화기행

[중국문화기행] 2001 태산 옥황정과 고궁박물원

강정순 2006. 4. 14. 12:41

泰山Tai Shan만큼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온 산도 없다.

德裕山덕유산 높이 정도이나

중국에서는 五岳중 으뜸으로 친다.

예로부터 秦始皇, 漢武帝, 唐玄宗

역대 제왕들이 태산에서 封禪봉선을 행했다.

진정으로 덕이 있는 황제만이 봉선을 허락받았다.

백성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이 산으로 돌아와

영생을 얻는다고 믿었으며,

이 산에 오름으로써 10년은 더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들은 고갯마루마다 문을 세우고

祠堂사당을 앉히길 주저하지 않았다.

태산에 오르다보면

가장 중국적인 모습들과 만난다.

남녀노소 구분할 것 없이 그 많은 인파들.

그들은 무엇인가를 씹어서 뱉고 마시고 피운다.

곳곳에서 기복을 드리는 사당과 만나는 일은

도교의 총본산답다

.


 

 

 

 

 

태산 일출은 신성한 일로 여긴다.

일출을 보기 위해서는

남천문에서 유숙을 해야 한다.

취푸曲阜에서 泰安Tai'an으로 온 우리는

50짜리 초대소에서

편안한 잠자리를 가졌다.

5.

강렬한 햇빛이 든다.

과일시장에 가서 수박도 샀다.

서둘러 泰山가는 입구에 섰다.

태산을 오르는 입장료는

여느 관광지보다 비싼 값이다.

입장료만 80.

여기에 자동차비와 보험료까지 포함한 98의 입장권은

적지 않은 돈인데도

산은 온통 중국인들로 가득하다.

태산에 대한 중국인들의 열정을 알 수 있다.

우리도 미니버스를 타고 中天門까지 갔다.

여기서 케이블카로 타고 갈 수 있고

돌계단을 걸어 올라갈 수도 있다.

우리는 걷기로 하였다.

반시간후 對松亭을 지나 昇仙橋에 다다랐다.

五大夫五松亭이라는 말은

이 곳의 소나무와 관련이 있다.

그 만큼 이곳은 소나무 일색이다.

8시가 되어서는

古稱 '天門關'천문관이라 이른

南大門에 다다랐다.

8백여 년 전에 道士 張志純이 창건한 것.

여기서부터 오르는 8백 미터가 제법 숨이 차다.

南天門까지의 돌계단만 7,412.

이 길을 대나무로 만든 가마를 타고

오르는 이가 있다.

비만을 넘어 거만한 체구들이다.

메고 가는 두 사람의 어깨에는

쇠가죽 같은 군살이 깊다.

그냥 걸어서 오르기도 힘들어하는 길이다.

이 시대 또 다른 奴隸노예가 아닐 수 없다.

 

中天門에서 조금 오르다 보면 五松亭이 나온다.

여기에 있는 세 그루의 소나무는 진시황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지금 이 나무는 나라때 補植보식을 한 것이다.

비로소 南天門에 다다랐다.

그러나 이곳이 마지막이 아니다.

정상까지는 우측으로 난 완만한 길을 따라

한참을 가야 한다.

남천문에서 정상까지는 돌배꽃이 한창이다.

하얀 돌배꽃으로 둘러싸인 사당은 붉다.

519일인데도 여기는 이제 봄이다.

이곳에 빈관이 있어 물으니

2人房120이라고 한다.

 

해돋이를 볼 셈이면 이곳에서 유숙을 한다.

태산은 불교적인 색채가 별로 없다.

道敎의 총본산이기 때문이다.

, , 라는 말은 모두 도교와 관계가 있다.

 

靑帝宮QingDiGong을 지나니 안내판이 나온다.

8시 반, 이제 정상이 보인다.

靑帝東方之神 古代神話中之五位天帝之一 又稱蒼帝 五位天帝

 

卽 東方靑帝 南方赤帝 中央黃帝 西方白帝 北方黑帝 靑帝主生

 

座鎭東方 歷代帝王百姓 敬神其靈感

이로써 그들이 이 산에 갖는 신심을 헤아릴 만 하다.

磨崖마애 글자들은 雄輝웅휘하다.

역대 문인 墨客묵객들의 손길이 곳곳에 남아 있다.

사진은 태산 대관봉에 있는 바위를 깎아 만든 비석이다.

紀泰山銘이라 이름한 글자는

높이 13m에 폭이 5m에 달한다.

글자만도 千字에 이른다.

 

 

비로소 태산의 정상에 올랐다.

돌산위에 세운 위황펑玉皇亭에는

極頂극정이라 새긴 石柱가 있다.

해발 1545m.

옥황정을 들어서면 향을 피우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마당 가운데는 十二干支를 새긴 무늬 판이 있다.

정 내부는 구름, , 선녀, 연꽃, 용들이 그려져 있다.

山神의 호위를 받고 선 玉皇上帝

절망 하고 고난에 찬 백성들에게

구원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다시 北京으로 왔다.

北京에는 天安門광장이 있고

자금성이 있으며 만리장성이 있다.

그러나 시작은

역전에 즐비한 남루한 人民을 만나는 것에서 부터다.

북경은 나라 대부터 세계무대에 등장한다.

당시의 번영은 마르코폴로의 東方見聞錄에 잘 나타나 있다.

인구로 보면 상하이上海보다 적고

삶의 로 보더라도 홍콩香港보다 떨어지지만

首都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고 있다.

북경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다.

낡은 건물들은 다듬어지고 길은 넓혀지고 있다.

도시화 현대화는 이제 중국식사회주의로서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명소 으뜸은

萬里長城Wanli Chengchan을 꼽는다.

기원전 7세기경 春秋戰國時代부터

북방 이민족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그들은 방벽을 쌓았다.

이를 秦始皇진시황이 증축하고 개축하기 시작하여

5백여 년 전에

6천 킬로미터의 장성을 구축하게 된다.

그는 중국을 통일한 후

30만의 군사와 수백만 명의 농민을 징발하여

벽돌()장성을 연결한다.

동쪽의 기점은 渤海灣Bo Hai만에 이웃한 산하이관山海關이고,

서쪽은 자위관嘉 關에서 끝난다.

화약총포의 개발은 기마전법의 無力化뿐 아니라,

都城長成의 무기력을 촉진하는 계기가 된다.

인민은 비로소 해방이 된 셈이다.

자금성은 故宮博物院이라 불린다.

紫薇자미 즉 천자를 상징하는 별자리의 하나이고,

禁城이란 王城이란 뜻.

곧 천자의 궁성이란 뜻이 된다.

·청조의 황제가 동서간 750m,

남북으로 960m나 되는 궁정수가

8백여 개가 넘는 곳에서 살았다.

40의 입장료는 전혀 아깝지 않다.

外朝內廷을 두루 둘러보는 데

하루로는 부족할 정도다.

역사가 그러하였으므로 이 속에 담긴 秘史도 많다.

寧壽宮區영수궁구 珍妃井도 그 중 하나다.

총명한 그녀는 1900義和團의화단 사건으로

외국군이 쳐들어올 때 도망하지 말고

담판을 하라고 光緖帝광서제에게 청하다가

西太后의 미움을 사 익사를 당한다.

역대 황제들은 만리장성으로

이민족들의 침범은 막을 수 있었지만,

반란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엄청난 높이의 외성을 쌓는다.

성벽 밖으로도 폭 52m垓字해자를 만들어 놓았다.

남쪽 끝의 천안문에서 북쪽 끝의 神武門까지

일직선으로 前三殿後三宮이 있다.

이를 만드는 데 13년이 걸렸다.

乾隆一朝(1736-1795) 宮廷繪畵展을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궁중의 이모저모를 그린 儀軌의궤 앞에 서면

3백 년 전의 숨소리가 그대로 전해온다.

사슴을 잡으려고 화살을 쏜 뒤

시종에게서 다시 화살을 받아드는 모습은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청나라 황제와 황후의 그림은

오늘 날 천연색사진 보다 더 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