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쌓은 돌탑
1
그는 검은 말을 타고 나타났습니다. 하늘에 별을 보아도 아리고 땅 위의 패랭이꽃만
보아도 그냥 가슴이 시릴 나이, 단기檀紀 4281년 서력西曆으로는 1948년입니다. 가
뭄도 그런 가뭄이 없던 해, 나는 면에 가서 토벌단 집회에 다녀오던 길이었습니다.
지서를 야습한 무리들이 태반이 죽어남고 나머지는 흩어져 산이고 들로 나돌 터이니
비적匪賊들은 본대로 지서에 신고를. 오다가 정월 햇볕이 너무 부셔서 숯막으로 이르
는 길, 작은 개울가 거기서 눈맞추고 앉았습니다. 이 물이 흘러서 어디로 갈까. 한참
을 눈맞추고 앉아 있는데 땋은 머리 댕기는 어디로 가고 흔들리는 물보라 물보라 위
로 말탄 대장이 거기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 동지를 찾아 불당佛堂으로 간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전에는 동만東滿에서 유격대장이 되어 해방된 조국에 들어온 사람, 젊
어서 기상은 기개처럼 우뚝하고 그을린 얼굴 가운데 눈빛만 살아 나는 그만 그분 눈
빛에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지금 동지들 곁으로 가야한다. 상처가 깊으니
어서 일러다오. 꿈이겠지요 분명. 산허리를 휘돌아 가면 숯막 가는 길. 거기까지 갈
요량을 어찌했을까. 어깻쭉지에 맞은 장총은 신발속까지 피가 고여서 세 날 세 밤이
지난 뒤에야 깨어났습니다. 스믈여덟 지난 일들을 몸부림 속에 나토는데 장백長白
준령 조국 승리 동맹이란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고운 이가 있었는가 정옥
이란 이름은. 상처가 아물어가면서 떨쳐 일어서는데 정작 이 몸엔 핏빛이 배어 나고
있었습니다.
몸이 불어가면서 가슴앓이도 있어 남모르는 그 자리에 와보았더니 속치마 찢어 어깻
쭉지를 감싼 붕대가 놓여있었습니다.
그것도 말라 비틀어진 채 놓여 있었습니다.
2
그는 산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오늘은 동, 내일은 남으로 걸음을 달리하는, 신작로
따라 전신주란 전신주는 다 잘리고 무기고가 털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양곡 창고가
바닥을 드러내는 일 한가운데 그가 있었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도가都家를 습격
한다. 그래서 산사람들이 몰려든 한밤, 나도 마당가에 머리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겨울 투쟁에 들어간다. 양식을 가진 자는 식량으로 장정이 있는 자는 자식을,
그러면서 일장 연설입니다. 꿈결에 정옥이란 이름을 되뇌이던 사람이 여린 줄만 알
았는데 저런 말씀을. 우러러 고개를 들어 그를 보는데 다가와 나를 말에 태웠습니다.
우리에겐 그대와 같은 약손이 필요하다. 분명 바람이었지요. 나는 하나도 힘들이지 않고 그의 말에 탔습니다.
가자. 하나된 조국의 깃발이 펄럭일 때까지 잠시 모든 것을 맡아 준다.
나는 그의 그림자가 되었습니다.
패랭이꽃이 피고 진 지가 얼마였더라, 산속 가을은 왔는가 싶게 가 버리고 이 사람은
낮밤이 따로 없어서 나갔다 하면 석삼일 다 채우고 들어오고 세 명이 나갔다간 열두
명이 되어 들어오더니 붕대솜 풀어내어 배냇적삼 만들어 놓고 있던 동짓달 스므삿
날 몸을 풀 적에도 이 사람은 보투補鬪 중이었습니다.
한 이레도 안 지나간 때 이른 눈 속, 일흔도 넘는 동지들을 이끌고 백두대간을 넘는
그의 눈을 보았습니다. 잠시 투쟁은 접어두고 북으로 간다. 하면서 내게 나침반을
쥐어 주는데 동서남북 천지를 어찌 가늠하려고 이걸주고 가셨을까. 진정으로 사람이
가치 있게 산다는 것이 어떤 것임을 알고 갔을 머슴아치 백정네의 짧은 목숨도 어딘
가에서 빛나고 있을 터. 토벌대가 몰려오고 총소리가 가까운 데도 밤재 안엔 아이의
고른 숨소리만 남았습니다. 손때 묻은 지남침만 펴 보았다 접었다, 아직도 따슨 체온
이 남아 있었습니다.
3
그 후로는 한 번도 못보셨나요. 아니다. 짧게 한 번 길게 두 번을 보았니라. 나는 잡
혀서 가는 곳마다 밟히고 맞았다. 너는 어디로 간 곳 모르게 보내져서 젖은 불어오는
데 당하기를 하도해 하혈이 강을 이루었다. 그들은 사람이면 할 수 없는 온갖 짓들을
다한 다음 감옥으로 날 보냈다. 가족들이 잡힐만큼 잡히고 갈릴 만큼 갈린 줄도 모르
고 보낸 그 해 여름. 나는 전사戰士가 되어갔다. 손에 든 칼과 낫이 없었을 뿐 나는
갇혀 사는 사람들 속에서 의인들과 만났다. 그날은 온다. 반드시 온다. 목숨처럼
사랑하는 것이 그분이더니 너이더니 마침내 기본이 바로선 나라라는 것을 아는 동안 다시 봄이 왔다. 나는 몸도 마음도 이 세상에 없었다.
그해 여름, 감옥 문이 열리고 도망자와 숨는 자가 다르고 전선으로 가는 자가 유별한
혼돈 사이로 그는 나를 찾아왔다. 눈이 부시도록 그는 장군이 되어있었다. 무슨 말이
있어야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묻지 않았으므로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정작 나는 네가 고모 손에 커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나는 울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그분이 울고 있었다.
모든 것을 알았다. 무너지고 불태워진 집도 보았다. 그래서 의용군으로 들어가셨나
요. 아니다. 다시 찾은 해방의 거리에서 할 일이 많았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이면
나는 어디든지 다가갔다. 그분이 북상중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그의 뒤를 밟았다.
가다가 막히고 다시 들어간 피아골. 바람처럼 다가와 머물다 가는 운명을 그도 알았
을까. 통일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그분은 죽었다. 네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고모의
밀항이 그때. 그렇습니다, 어머니. 저는 이제 어머니가 두 분이십니다. 그렇구나 아
들아. 네가 그토록 보고 싶어하는 분은 바로 네 속에 있다. 죽되 죽지 않는다는 그분
말씀이, 모습이 예순 지난 이 나이에야 비로소 보이는구나.
4
나는 이 산을 떠날 수가 없었다. 육신은 갈려 나갔으나 순하디순한 혼백은 이골 안에
남아 철 따라 살아났다. 철쭉이 필 적에는 연분홍 꽃잎으로 살아나고 산나리 그 푸른
꽃잎이 다할 적에는 씨알로 여물었다. 시절은 그리움도 재워가는가. 사모하여 울음
삭히며 보낸 날들이 지나가고 처연한 날들을 지나치면서 산골에 목숨 바친 이들을
거두기 시작했다. 후천 세상을 헤아린 것은 아니어도 이 골 저 골마다 눈 못 감고
간 사람들이 어디 한둘인가. 한때는 비적匪賊으로 몰리더니 이제는 공비共匪라 불린
우리 이웃간. 가족들도 차마 거두지 못하는 시신들은 삭아서 풀이 되고 꽃이 되었다.
그 꽃들을 보듬듯 쓰다듬노라면 여름은 길지 않고 겨울 해도 짧았다. 나는 곳곳마다
표지석을 세웠다. 주검 마냥 널널이 널린 돌들 쌓아가며 원추리도 곁심었다. 7월 한
달 이 산에는 순백의 아름다움을 넘어 노란 입술들로 원추리꽃이 장관을 이룬다. 그
들은 무슨 말씀하고자 함이다.
그러하기에 별무리 쏟아지는 삼경에 입술을 열고나와 새벽이 동터 오는 아침 완연한
모습으로 손짓들이지. 해원解寃의 아침 밭에 가서보면 누구를 용서하는 일도 사치한
장식이다. 살아 생전 끝내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죽은 자가 먼저 용서를 하고
드는 것을 산 자만 모르고 여기까지 왔다. 먹물 들인 옷 입고 폐사廢寺에 묻혀 산 지
30년. 철 따라 제 새끼 거두어 가는 강남 제비도 시절을 달리하며 한자리에 흙집을
짓고 새끼의 새끼들이 새끼로 이어져 오는 동안 나도 늙는가. 고을마다 널린 돌탑들
을 마음 가운데다 쌓아갔다. 비탈진 곳 쫓기듯 넘어진 주검의 갈구渴求도 쓰다듬어
가며 마음 한구석에 재워두고 났더니 이승과 저승은 한 맥이어서 그런가, 밤마다 그
들은 내 꿈속에 내려와 춤추고 노래도 부르며 밤 내 놀다간다. 정작 타오르는 모닥불
만 뒤적이고 앉아 있던 사람은 지금 너만한 나이로만 살아 올라 손을 이끄는데 귓가
에 와닿는 소리, 사위는 느려서 안기는듯 취하다 보면 어느덧 점점이 다가오는 새벽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