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쌓은 돌탑

에필로그

강정순 2006. 10. 16. 08:03

 

 

 

                 에필로그

 

 


아무래도 네가 진로를 잘못 정한 것 같다. 

누구로부터 무슨 말을 전해들었던지 아버지는 낙담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 

이 선비라 이름하는 文筆은 더구나 60년대에서 70년대로 이어지는 그 당시 글을 쓴다

는 것은 가난이 예약되어 있거나 사치스러운 일에 속하였다. 먹는 일 하나에 온 가족 

이 매달려야 하던 시절. 대학은, 일시에 처지를 반전시키는 해결사 같은 것이었다. 

울로 올라왔다. 1969년 서울은 화폭에다 어둔 밑그림을 그려놓은 水彩畵 같은 곳 

이었다. 나는 筆洞에서 4년간을 머물렀다. 敎鍊이 학내문제가 되더니 三選改憲이  

불거지고 그래서 緊急措置가 계속되는 어둔 세상을 몸으로 살아본 사람들은 무기력 

과 회한으로 痛飮을 마다치 않던 그런 때, 나는 오로지 도서관에 묻혀 살았다.  

前衛隊列에 선 학우들이 피를 흘리며 연행에 연행을 거듭하는 동안에도 나는 나서지 

않았다. 교양학부를 마치기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그리고 그 이듬해 작은아버지의 죽

음이 이어지는 동안, 흩어지듯 산 동생들에게 나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였다.  

두 아들을 앞세운 할머니의 수발은 여전히 어머니의 몫으로 남았다. 그러니 학창시절을 다만 시늉하며 지냈을 뿐. 그도 잠시, 졸업과 동시에 나는 군대로 들어갔다.  

짧게 다짐한 시작이었으나 오랫동안 옥죌 줄을 모른 채 나라에 저당 잡힌 청춘. 나는 

半白이 되어서야 조롱鳥籠밖 세상으로 나섰다.

 
 여기 이 글들은 그 동안 써놓은 글속에서 가려뽑은 것들이다. 매인 몸이었기에 더욱 

간절한 느낌들이 순탄치 못한 家庭事와 어울러져 날줄이 되고 씨줄이 되었다.  

편의상 1부와 2부로 구분 지었을 뿐, 30년간에 이르는 들숨과 날숨은 매 한가지다.  

내 몸속에 피 또한 식지 않았다. 세속간 지위와 명예 그리고 재물도 부질없이 여겨 

지는 이 마당에 식지 않은 피가 무슨 대수인가. 마는 아직도 마음속에는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섬진강이 흐르고, 제대로 품을 수 없는 산의 맥이 우뚝하다.  

그래서 바다로 들로 혹은 저자거리로 들어서서 母音이 같은 사람들을 즐겨 만났다.  

그들은 손으로는 단 한 줄도 글로 써보지는 못하였어도 보석처럼 빛나는 詩語들을  

가슴속에 담아가며 사는 사람들이다. 배운 자, 가진 자들이 누리며 사는 세상 속에서 

제 목소리도 숨죽여 가며 사는 사람들은 들꽃처럼 지천에 널려있다. 그런 사람들을  

이웃으로 두고 사는 내가 스므살 나이로 해방을 맞았다면 나는 戰士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동포가 받고 있는 고통과 신음을 외면하는 것은 가슴이 뜨거운 사람이 취할 

일이 아니다.  

젊어 한 때 나는 긴급조치로 이어지는 현실 앞에 수수방관하면서 장학금에 매료되어 

있었다. 산다는 것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다 지워지고 흩어지고 만다. 정말 그런가.  

나는 틈내어 산 속으로 들어갔다. 마을 뒷 산 고개를 넘어서면 文殊골. 이미 길은 묵 

혀져 가고 말았다. 老姑壇을 바라보며 밤재를 지나 왼편으로 이르다보면 거기 1개  

소대를 넉넉히 아울렀을 터전에 이른다. 두 사람이 충분히 생활하였을 哨幕도 柱礎로

만 남아있는 곳. 목숨과도 맞바꾸길 아까워하지 않았던 청춘들이 거기에 있었다.  

[내 마음에 쌓은 돌탑]은 바로 그곳에서 이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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