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생시절에

1973 - 5월

강정순 2007. 3. 10. 21:03

5월 1일
선임구대장이 돌변하기 시작했다. 夕食後 한 시간 동안 특별훈련을 받았다.
굴러이동을 할 때에는 眩氣症이 났다. 땅과 하늘이 빙그르르 돌았다.
" 임마! 정신 차려" 몽둥이가 날아왔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吐해냈다.
깨운다. 불침번이다. 2번립과 교대하고 舍外로 나왔다. 보초를 서고 오는 下番立이 들어온다. 오늘서부터 보초근무다. 다음 후보생에게 근무를 인계하고 나도 복도에 앉았다. 다른 후보생들과 함께 오늘 있을 학과시험을 준비했다.
기상과 함께 다시 들볶는다. 아래층에서 터지는 소리가 그대로 다 들린다. 고원배후보생은 지금 洗禮중이다.
식당으로 이동중 直角步行이더니 밥을 먹을 때도 허리를 조금도 못 구부리게 한다. 우리는 수저를 직각으로 세워가며 아침 식사를 하였다.
마른 날씨 끝에 비가 온다. 휴가를 나갔던 구대장도 돌아왔다. 바둑이구대장 때문에 힘들었던 괴로움은 어디로 가고 반가움이 함께 왔다.

 

5월 2일
구름이 걷혔다. 이 비가 좀 오래 오지 않고서...
소대전투는 배운 바 있다. 오늘은 분대전투. 왜 그냥 지나쳤을까. 있음직한 특별훈련도 없이 분대전투를 끝냈다. 그래서 기분 좋은데 晝食査閱도 한번에 지나쳐서 더욱 기뻤다.
여러 통의 편지가 와 있다. 후보생 이전의 일들을 떠올리게 하는 편지들이다.
스칼라다방의 커피, 장충단공원의 소슬한 야경, ROTC로 임관한 李熙九는 지금 尙武臺다.

 

5월 3일
관물정돈을 하다가 몽둥이 타작을 당했다. 체련복은 힘이 없다. 맷값이 그대로 전해왔다.
체육대회가 오후로 연기되어 대신 體鍊을 하였다.
선임구대장이 야단을 친다. 뒤로 돌아서라고 한다. 프라타나스잎은 무성하다.
" 여기는 군대이니까 하라는 대로 다 하겠지?"
" 넷!" 250명의 목소리가 얼음장 깨는 소리를 낸다.
" 꿀, 꿀 꿀, 세 번을 한다. 실시!"
우리는 다같이 돼지 멱따는 소리를 냈다.
" 너희들이 돼지 같은 짓을 하면 우리는 돼지몰이에 불과해진다. 너희들이 신병과 같은 짓을 하면  우리는 신병 구대장이 되는 것이다. 알겠나?"
돼지가 眞珠를 어찌 알겠습니까, 요.
步哨. 편대본부 앞에서 첫 근무를 섰다. 末番立인데 일번립이 올 때까지 대신 근무를 두 시간 섰다. 어깨걸어총을 하고 있는데 지나가는 장교는 어찌나 많은 지. 그 때마다 異狀無 소리를 질러대야만 했다. 
8시가 다되어서 식당으로 갔다. 타 놓은 밥은 식어서 굳었다.
편대본부에서 假眠에 들어갔다. 9시가 좀 지난 시각. 옷을 입고 자는 것도 일찍 재워주는 일도 처음이다.

 

5월 5일

첫면회가 있는 날. 먼저 대대장 내무검사다.
내 앞에 와서는 장교의 책임을 묻는다.
" 장교의 책임. 장교의 책임이란…… 그 책임의 중대함을 항상 자각하여 풍부한 지식과 덕성을 쌓고……"
틀리지 않은 후보생이 단 한 사람뿐이라고 한다.
좋던 기분이 면회대기상태로 접어들자 달라지기 시작한다.
 一次호명자들이 나갔다. 다시 한 차례.
그러면 그렇지, 내 이름이 나왔다. 대열을 갖춰 면회실로 갔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아니다. 姜敬淳인데 나를 부른 것이다.
下豫區隊長 南淳이가 당직사관실로 불러낸다.
그는 서울에서 오는 전화를 받은 상태였다.
내무반을 둘러보게 하여준다. 자식이 자고 생활하는 곳. 
정해진 두 시간 반이 어떻게 지나간지 모르게 간 다음, 이제 작별이다. 순서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지금은 帳幕을 내릴 때다.

 

5월 6일
첫 외출. 부대버스에 올라탔다. 8시. 우리는 先導車의 호위를 받았다. 어머니는 大田驛광장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대열해산 명령을 기다렸다.
" 접니다" 손을 잡았더니
" 아이고 너냐" 시며 감격해 하신다.
아침에 사령부 정문으로 오셨다가 헌병근무자 이야기를 듣고 이리 왔노라는 말씀이다.
" 여기까지 왔다가 니를 못보고 간 날에는 내 속이 어떻게 되겠냐?"
여관방을 잡았다. 훈련은 받을 만 하며 매 끼니 잘 먹고 있다는
설명을 해 드렸다.
" 그러면 내가 한걱정 놓겠구나"
밤기차로 오셨으니 조금 쉬게 해 드리고 싶었다. 시장에 나가 고무신을 샀다.
백반을 시켜 오신다.  목이 타신다기에 막걸리를 주문했다.
세 시에 西大田으로 나가 배웅을 해드렸다.
개찰구에서 돌아보신다. 경례를 올렸다.
다시 내무반원들이 있는 五福堂으로 갔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4시 10분에 역 광장. 하나, 둘씩 귀대 대열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어제는 면회를 하였겠다, 오늘은 첫외출이었으니 얼마나 좋은가.
過하면 넘치는 법. 그래서인가. 점호장 집합이다.
" 소금에서 간수를 빼내듯, 너희들 머릿속에 박힌 사회의 썩은 물을 빼 내겠다!
우리는 당직사관으로부터 화려한 푸닥거리를 선물 받았다.
 
5월 8일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서 아무것도 못하였다. 食水까지 斷水다. 그러니 세수는 무슨 세수.
소대전투를 배우는 야외훈련장. 풋풋한 냄새가 난다. 쑥은 밟히고 클로버는 뭉개진다.
내무교육이 다시 시작되었다.

 

5월 9일
分隊戰鬪場으로 나갔다. 볕이 따갑다. 자연 행동이 완만해 질 수밖에 없다.교관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 행동이 그것 밖에 못되나? 정말 그것 밖에 못 취하나?"
좌우로 굴러 이동이다.
그런데 이 무슨. 大隊長이 우리를 지켜본 모양이다. 일어났다. 대대장 덕이다.
晝食査閱을 끝내고 활주로 西端 무렵 왔는데 先頭가 방향을 바꾼다.
물이 고여 있는 장소를 피해서 갔다는 것이 그 이유다.
우리는 물이 고여 있는 곳을 구보로 뛰었다. 다시 돌고 하기를 거듭하는 동안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군화 속으로 물이 들어왔다.
식사를 마치고 보니 바짓가랑이는 흙칠 범벅이다.
 '한국과 한국인'이라는 성균관대학원장 柳宗悅의 정훈교육이다.
중국은 形體에 일본은 色彩에 우리나라는 線에  예술적 특징이 있다는
들어 좋은 소리를 반절은 졸고 있다.
한국인의 장점을 끈기, 창조적이고 도덕성이 강하다는데서 찾고 있다.
이에 反해 단결심과 조직력이 부족하고 지나치게 낙천적이며 運命至上主義에다 慕華思想이 강한 것이 흠이라고 지적한다.

 

5월 11일
두 달이 다 되었다. 한 2년쯤 지나간 것 같다. 모든 것을 버리고 들어왔는데 이제 하나둘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권총예비사격을 나갔다. 영외이동이지만 처음 같지 않다. 그 때는 얼마나 마음이 설레었던가. 장교과정만이 拳銃사격이 있다. 장교과정이기에 한 번 더 치러야하는 신고식. 땀이 비 오듯 한다. 구보로 뛰어갔다. 待機線에 가면 주의사항이다.  
曳光彈 다섯 발을 받았다.
다리를 벌린다. 상체를 좌로 약간 이동한다. 숨을 고르며 통제탑의 지시를 기다린다. 
" 사격 개시. 연속 완사"
첫 발이 튀어 올랐다. 별똥별이 포물선을 그리듯 불빛을 내고 날아간다.
맞았을까? 타깃으로 다가갔다. 두 발만이 과녁을 통과했다. 
사격장에서 두 시간을 시달리고 났는데 다시 야간 무장구보다.
처음 맞는 영외구보. 그러나 儒城까지가 아니다. 느리게 뛰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으나 힘이 들었다. 피로가 한꺼번에 닥친 까닭이다.

 

5월 12일
暗記상태 口頭시험을 보았다. 이것 때문에 자습시간도 많았다.
國民敎育憲章에서 군인의 길, 軍陣守則, 장교의 책임…… 각종 보고요령까지 열다섯 가지나 된다.
오후에는 면회시간이다. 반 수 이상이 제3연병장으로 나간다. 남은 우리는 자유시간을 가졌다. 세탁도 한다. 편지를 쓴다. 넉넉한 시간이다.
석식 후에는 송충이 驅除작업. 소풍가는 기분이 난다.
작년 敎生實習 때 社稷公園으로 가서 학생들과 이 일을 했다.
일년 전 일인데도 10년 전 같은 기분이 들었다.

 

5월 13일
한 週間의 대대장 근무후보생근무를 맡았다. 먼저 일어나고 가장 늦게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생활. 모든 보고책임은 대대장근무후보생에게 있다.
대식당에서 기다리고 있노라면 훈육관들이 兵食을 하려고 들어선다.
" 동작 그만! 움직이지 마! 필승! 대기 중"
움직이지 마, 라는 말은 한마디 덧붙인 것이다. 동작 그만이면 된다.
존칭어가 있다면 나는 지금 훈육관에게 極尊稱을 쓰고 있는 셈이다.
자연히 훈육관에게서 이런 말이 떨어진다.
"쉬어"
"쉬어" 復命復唱을 한다.
그런 뒤 후보생에게 일동 쉬어가 주어진다.

 

5월 21일
OSI에서 指紋을 채취해 간다. 身元陳述書도 써냈다. 항목도 많다. 존경하는 인물을 쓰란다. 朴正熙대통령. 감명 깊게 읽은 책. 亂中日記. 어째 좀 낯이 간지럽다. 咸錫憲은 드러내 놓아선 안된다. 五味川純平의 '人間의 條件'도 여기선 아니다.
" 再修를 안 한 사람은 몇 년도에 국민학교에 입학한 것이냐?"
朴泳和는 쉽게 답을 구할 생각이다. 나는 지금 손가락을 펴가며 그 때를 헤아리고 있는 중이다.
" 57년 아니겠어?"
" 그런가?"
당직사관의 命을 받아 일석점호를 대신 취하였다.

 

5월 22일
근무교대. 어제 저녁부터 근무요령을 申送해 주었다. 배운 게 많다.
지휘통솔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도와준 근무후보생들에게 감사했다.
" 어떠니? 시원하겠다.
" 애썼어. 잘 한 거야"
도와준 근무후보생들에게 감사했다.  지금까지 내 총을 대신 메고 다닌 金容文한테 특히 고마웠다.
중대장은 처음으로 내 경례를 받아주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교대신고를 하면서 7구대장에게 당했다. 下番大隊長勤務후보생이라고
하였더니 그런 말이 어디 있냐며 푸싱이다.
일주 간 근무를 서며 맞지 않았다 하였더니 기어이 맞고 말았다.

 

5월 23일
몸이 수척해졌다. 遊擊場에 가보니 느낌이 왔다. 밧줄에 매달렸다. 손을 놓으면 10m아래로 추락이다. 힘이 들어간다. 생각도 함께 헝클어진다.
'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그냥 잘 있다라고 만 그렇게 편지를 해주세요.'
힘이 쳐진다. 중간밖에 오지 않았다.
' 저는 여자여요. 선생님께서는 가슴속 깊이 간직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주셨어요. 부디 선생님의 기억 속에서 제가 부셔져 버리지 말기를'
간신히 밧줄을 타고 내려왔다.

 

5월 24일
특기별 이야기가 나왔다. 制式훈련을 마치고 프라타나스나무 그늘에 앉았다.
" 교육특기 지원한 후보생 없나?"
金容文을 비롯한 서너 명이 손을 들었다.
" 姜貞淳, 너 교육지망 아니냐?"
" 아닙니다. 정훈 지망을 했습니다"
" 政訓?"
교사자격증이 있으니 너 같으면 교육특기를 받아서 기술고등학교 교관으로 갈 수 있는 것 아니겠어? 구대장은 의외로 여기는 눈치다.
이제 내일이면 훈련장도 끝이 난다. 처음 훈련장신고식을 하였을 때 구르던 일이 오히려 가볍게 여겨졌다.
각개전투실습시험을 치렀다. 제 1匍腹. 제 2포복. 腹射자세. 腹臥자세. 좌우 이동. 좌우 굴러 이동. 躍進과 掘進.
이제는 귀에 익은 단어들이 됐다.

 

5월 25일
대단한 黃砂다. 카빈기록사격을 하고 와서는 무장구보를 하였다. 기지법당 앞으로 돌아가는 곳에 海松이 있다. 海松에 松花가 한창이다.
공중 위로 날리는 것이 황사인지 松花가루인지를 모를 정도다.

 

5월 26일
나는 왜 이리 피곤한지 모르겠다. 모레 있을 4부 시험 때문인가. 그것이 끝나면 군사훈련의 종합판인 종합훈련이 있다. 혹독한 기합이다. 주말이라고 다를까. 그런데 뛰며 흘린 땀은 어떻게 보충한다지?
호명이 되어 면회실로 나가는 후보생이 부럽게 여겨졌다.

 

5월 29일
2박 3일간의 종합훈련을 떠나는 날. 5시에 起床이다. 어제 밤에는 官物含을 봉함하고 배낭은 침상 밑에 놓고 잤다. 세수도 대얏물에 서넛이서 함께 썼다.
作戰命令이다. 적 2개 소대 출현. 적군과 아군현황을 설명한다.
주요전투부대가 부여됐다. 행정과 군수지원부대가 편성되고 지휘계통선상에 대대장이 섰다.        
7시. 부대를 나섰다. 儒城 삼거리까지는 三列縱隊로 갔다. 그곳부터는 소대 행군종대. 고가도로를 지났다. 무궁화나무를 심어 가로가 풍성해진  마을 길가에서 휴식이 주어졌다. 우리 소대는 상추밭가에 앉았다. 할머니 한 분이 채소밭일을 하다말고 옆집으로 들어간다. 다시 행군. 냇가에 도착할 때까지 는 상황이 부여되지 않았다. 개천에다 장구를 풀고 쉬었다. 건너는 支署다.
우리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고르지 않은 황토 길이다. 한동안 박정자고개를 오르고 나서 국민학교로 들어갔다. 이렇게 오전이 지나간다.
밤나무와 소나무밭. 그 아래에서 점심식사인데 돈육찌개에는 고기가 넘쳐났다.
다시 출발. 錦江을 따라 간다. 木橋를 건넌다. 野地정복임무가 떨어진다. 가상적이 최루탄을 투척해 왔다. 방독면을 썼다. 산을 오른다.
" 더 엎드려, 엎드려"
공격자세가 노출되어 있다며 교관들이 야단이다. 그런 뒤 주어진 휴식. 강 너머는 마을이다. 모래톱에는 배가 닿아있다.
다시 尖兵소대로 왔다.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가는데 공습경보가 하달된다. T-41훈련기가 나타났다. 논두렁을 지나 산으로 피해 올라갔다. 상황끝.
저녁이 되어 효포국민학교에 도착했다. 단층건물이다. 운동장도 널찍하다. 개울가 문방구에 있던 아이들이 몰려든다. 신기한 구경거리임에 틀림없다. 감미품이 지급됐다. 사탕과 빵. 교실은 치워져 있다.
머리를 벽 쪽으로 두고 누웠다. 8시. 잠은 쉬 들지 않는다. 사탕 부셔지는 소리. 교실바닥이어서 발이 시리다. 양말을 갈아 신고 체련복을 꺼내 입었다. 雨衣까지 걸치고 났더니 한결 나아졌다. 불침번교대를 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5월 30일
두시에 불침번근무다. 그런데 왜 이리 추운가. 피교육자는 춥고 배고프다더니 그래서인가. 5시에 기상을 하였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추위와 싸울 뻔 했다, 5월이 다 가는 이 아침에.
태권도로 아침체조를 대신했다. 서편야산아래 敎會堂이 보인다. 출발은 7시.
이내 敵襲이다. 밋밋한 야산, 키 작은 갈참나무. 우리는 노출될 대로 노출됐다. 2분대를 인솔했다. 올라보니 제법 높이가 있다. 일개분대의 적이 훈련탄을 쏘아대고 있다. 피해가 나지 않은 征服. 적색탄이 오른다. 상황 끝.
다시 행진이다. 이번에는 남쪽방향이다.
화생방가스, 공습경보가 연속해서 이어진다. 보리밭 지나 찔레나무 아래에서 잠시 휴식이 주어진다.
甲寺까지 왔다. 亂離에 불타버린 절은 조용하다. 우리는 寺刹경내를 배경 삼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구릿빛 얼굴들이 어떻게 담겨 나올까.
아주머니들이 개울가에서 한 잔씩 한 모양이다. 醉했음이 역력하다.
" 군인 아저씨 불쌍해"
" 뭐가 불쌍해" 안경을 낀 아주머니가 그 말을 받는다.
우리는 中壯국민학교에다 軍裝을 풀었다. 비가 올 것 같은 날씨. 陣中근무. 8시까지 西南門을 지켰다. 부근마을 아이들이 몰려든다.
" 위험하다 애들아, 빨리 가"
그래도 아이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놓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大檢이 꽂힌 銃身으로 한번 겁을 주었더니 선두를 다투며 돌아간다.
내일은 鷄龍山을 넘어 男妹塔을 지나 東鶴寺로 내려가는 山岳行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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