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날이 마땅치 않은 젊은이들이 갈곳이 어디겠는가.
밥빌라 절에 간다고,
하고 많은 티베트인들이 스님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맥그로지 간지 그 좁은 곳에
반절은 스님이라고 보면 된다.
달라이라마도 너무 많다,
소수정예를 말씀하셨다고 들었다.
우리처럼 어느 절에 들어가서 나올 때까지
스님 뒷모습도
[보지]못하고 나오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이곳은 갈곳없는 이들이어서 그런지
거리마다 죽치고 구경하고 희희낙락이다.
머리만 깎으면 비구니가 따로없겠다.
그런 심정이 가는 한국인 낭자는
그곳에서 티벳어와 철학공부를 시작한지
5년째라고 한다.
집이 大邱라던데
우리나라에서는 日文學을 전공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갔는데 지도 교수가
이 학생이 동양계임을 고려하여
티벳공부를 천거해 주었다고 한다.
부모님이 대단하시네요.
내 입에서 나온 소리는 그 것 밖에,
과년한 딸아이가 그렇게 나올 때
부모 심정 어떠했을지는 상상이 간다.
15년째 거기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한국스님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보지는 못했다. 還國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님들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
지나칠 정도로 요구 수준이 엄격하고 높다.
아마 스님들도 숨이 막힐 지경일 것이다.
스님이 술을 마신다? 고기를 먹는다?
우리나라만 그것이 문제가 된다.
泰國에서 온 스님하고 합숙을 오래 하였는데
이것은 스님인지 여행객인지
구분이 안가는 처신이어서
놀라움과 실망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스님이라면 어디서든 기상과 취침
그리고 독경과 명상등
일정한 戒律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우리 사고다.
태국승의 기상은 10시도 좋고 11시도 좋다.
거리에서 담배도 태운다.
아예 방을 구해 몇 년쯤 머물 생각을 하고 있는
우리나라 처자에게 그런 소리를 하였더니
남방불교에 대한 이해가 낮은데서 오는
오해라는 것이다.
이 스님들은 학승과 스님으로 구분이 되는데,
학승은 술도 마실수 있고 여자도 접할 수 있는 등
말 그대로 학생이라는 것이다. 환속도 가능하다.
그 단계를 벗어나면
이른 바 스님의 길로 들어가는 데
그 경지는 우리나라의 고덕대승에
견줄 바가 아니라고.
석가모니도 돼지고기를 대접받고 탈이 나서
죽음에 이르렀다고 하는 말은 널리 알려진 소리다.
우리 스님들도 고기 드시는 걸
경원시 여겨선 안될 것 같다.
달라이라마의 공관을 사이에 두고 있는 남걀사원에서는
스님들을 위해 차이Chai를 끓이는 데
버터를 넣어서 함께 끓여낸다.
한국에서 왔노라, 그러면서 절밥도 축내 봤는 데
양고기 요리가 함께 나왔다.
이미 시중에 공공연하게 떠도는 음식을 마다할 것 무엇인가.
티베트의 지체 높은 老스님들은 따로 나가서 산다.
민가에 누추한 거처를 마련해서 손수 끓여 드시거나
산자락에 돌을 주워모아 집을 만들어 거기서 산다.
먹는 것을 가리고 안가리고가 道의 척도는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나는 [부다 ]라는 말이 부처
즉 깨달은 사람으로만 알았는데
황금사원에 가서 보니 부다라는 말이
인도에서는 The Old Man이라고 하는 경칭임을 알았다.
인도는 힌두의 나라다.
10억인구의 82%가 힌두교 신자다.
불교는 0. 몇% 정도.
산이고 들이고 마을이고 간에 도처에 힌두 사당이다.
무슨 무당집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집집마다 힌두상을 모셔놓고 있다.
맥그로지 간지에도 힌두사당이
사원경내에 놓여있음을 보았다.
작년 겨울에 한국에서 대거
달라이라마 친견법회를 보러 간 모양이다.
따로 기부금을 내어야 그런 법회가 마련된다고 한다.
맥그로지 간지를 떠나기 앞서
수백명의 대만사람들을 위한 친견법회가 열렸다.
거기서 인도승을 보았다.
스리랑카나 방글라데시에서 온 스님들인가
싶었더니 종이를 내민다.
부다가야쪽에서 온 스님들로
절을 짓기위한 시주를 받는 중이었다.
석가모니가 출가를 해서 가사를 입고
참선수행을 했을 때의 차림이
이런 모습이었겠다, 하는 기분이 절로 들었다.
얼굴이 검다싶은 가난한 스님들에게
누군가가 한 끼의 공양을
노천에다 차려내는 것도 지켜보았다.
인도내에서 스님들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었던지
달라이라마의 법회가 이어지는 3일 동안
나 처럼 남걀사원 회랑에서 잠을 잤다.
절과 스님들에 대해 익숙해져 있어서인가.
나는 그저 그렇게 넘어가는 데
호주며 카나다에서 온 여행객들의
달라이라마에 대한 경배는
하도 지극하여 감탄을 자아낸다.
경배에도 일정한 격식이 있음을 보았다.
머리숙여 하얀 실크를 올린다.
먼 곳에서 앉아 있는 사람들은
매미날개같은 것을 손가락에 끼고서
주문을 외우는 데
서방인들의 지극정성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다녀보면 비교가 쉽다.
동양권에서 여행보따리를 둘러메고 나서는
族屬은 한국과 일본이다.
어쩌다 臺灣아이 싱가폴 그리고
말레지아 아이도 눈에 띄긴 한다.
베트남 학승도 있다. 그러나 百에 한 둘이다.
지금 한국열풍은 그 度를 넘어서
일본을 앞지르고 있다.
한국이 굉장히 잘사는 나라로 비춰지고 있다.
일본 젊은이들은 가장 싼 宿所를 찾는다.
우리보다 3배는 더 잘살면서도
합숙소를 먼저 찾고 없으면
한 단계씩 올라간다.
우리는 중간수준의 방을 먼저 찾는다.
혼자서도 獨室을 쓴다.
일본아이들은 왜소하다.
倭라는 이름이 그냥 생긴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는 짓도 왜소하다.
머스매가 寺院에 앉자 뜨개질을 한다.
혼자서는 조용하고 침착한 데 모이면 시끄럽다.
요즘 일본의 젊은이는 건방지고 無禮하다.
모이면 힘이 생기는 민족이 일본이라선가.
우리는 혼자서는 똑똑한 데
여럿이 모이면 衆口難防이다.
근 40일을 맥그로지 간지에 머물다 보니
그곳 사정에 훤하여져,
한국 젊은이에게 값싼 방을 천거해 주었더니
답을 못내는 걸 봤다.
남자 둘에 여자 넷이어서
의견이 갈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차림부터가 華麗하다.
1달러에 1,200원이라는 힘없는 돈이
인도에서는 제법 가치가 있어
맘껏 돈자랑을 하는 바람에
현지인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다.
맥그로지 간지에 사는 티베트인들은 모두 난민신세다.
정기적으로 인도정부의 체류연장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들은 400km너머 히말라야를
28일에 걸쳐 넘어 온 사람들이다.
지금도 그 행렬은 이어진다.
루트를 알선해주고 돈을 받는 조직이 있어서
전가족이 그 대열에 합류한다는 건
전혀 불가능하다고 한다.
요는 젊은 이들이 문제다.
그들은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를 갖지 못하였고
따라서 좋은 직장을 구할 수도 없다.
여권이 없으니 외국여행은 꿈도 못꿀일이다.
오직 관광객들에게 매달려 물건을 팔고
음식점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다반사다.
생김이 우리와 비슷하여
이질감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 젊은이들의 최대 희망은
시민권을 획득하는 길이다.
4,5년전에는 일본 여자들이 타켓이였다던데
지금은 한국처자들이 그 대상이 됐다.
내가 근 한달간 머물던 숙소에 일본처자도
청소하는 티베트 청년하고
아예 한 방을 쓰는 걸 보았다.
3년째 그 집을 드나드는 여자라고 한다.
우리나라 여자들 헤픈 것은 씀씀이만이 아니다.
아랫도리 허술히 간수하는 건 어른 뺨친다.
지나치다, 그렇게 일러주었더니
그런게 여행의 추억아닙니까...
하고 나오는 당찬 처녀아이도 봤다.
오빠라든지 뭐 어떻게 엮어졌는지
현지에서 합방을 해가며 여행들이다.
술에 담배는 말할 것도 없고
맘에 들면 일정을 함께하고
적당한 곳에서 길을 달리한다고 하니
너무 앞서가는 게 아닌가.
그것도 사람 나름이다.
나도 좀 헤프게 굴어보려고 하였더니
물간 생선을 누가 들춰나 보던가.
아주 고적히 보냈다.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는 먹는 일이다.
현지음식을 통해
食文化와 味感을 익히는 것이 樂인데
티베트인들이 갖고 있는 中國觀 때문에
그곳에만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지 않아
한국식당은 그야말로
절름발이 식당일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음식이라는 것이 밑반찬 음식 아닌가.
나물에 김치 그리고 생선 뭐 이런 것들이
찌개와 어울어져야 밥먹은 것 같은 데
인도에서는 한국식당가지고
승부걸기가 어렵게 보였다.
나는 티베트 빵인 박레 두개로 아침식사를 했다.
호빵처럼 생겼는데
이스트를 넣어 반죽을 해 두었다가
화덕에 구워낸 것.
따슬 때 먹어야 좋다.
담백하여 나이든 우리에게 제격이었다.
낮에는 만두라 불리우는 모모 5개.
저녁은 6백원정도 하는 볶음밥.
이것도 점차 줄여 두 끼로 해 보았다.
한 달이 지나자 뱃살이 빠지고
단전이 손에 잡히더니
마침내 8kg이 빠져 나가는 바람에
돈들이지 않고 1겹살을 만들어 봤다.
힘에 부치는 자 반드시 印度로 갈 일이다.
다람살라에 있는 티베트 도서관에 들어서면
그들이 중국을 탈출해나오며 갖고온
다양한 자료들을 접할 수 있는데
이곳에는 티베트 망명정부
여러 기관들이 들어서 있어
맥그로지 간지로 가는 Local bus에는
이런 거지 가족도 함께 타고
가는데
대를 물려 구걸을 한 터라
이 아이들도 분명 거지가문을 이룰것인데
맥그로지 간지의 버스정류장에 내려서면
일곱 군데로 갈리는 길목 에서
길찾기에 쉽지않다
거리는 그야말로 외국인이 반반이고
이렇게 베틀에 앉은 망명 1세대에 비해
이 아이들은 노트북에 오토바이
Tibetian Institute of Performing Arts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면 걱정거리 하나
없어 보인다
그런데 작은 2층건물
Tibet Museum에 가서 보면
그들의 근대사를 보여주는
사진이 몇점 있다
이 사진은 30년대
달라이 라마의 경호부대 모습이며
이 피묻은 scaf는
중국으로부터 정치범으로 고통받았던
그들 민족의 흔적으로
이 모두 Free Tibet을 향한 함성이다
2004년 이 숙소에서 38일간 머물며
이 길로 사원에 가는데
달라이라마의 여름공관 그 맞은 편에
(생일은 7.7)
Namgyal Gompa라 이름하는 곳
중이 제 머리는 못깎는다 했던가
진언이 새겨진 이 돌들은
모두 신심깊은 티베트족들이 이룬 것으로
돈다는 의미의 Kora를 하다보면
앞산이 Triund이고
뒷산이 Indra Hara이다
저 아래는 다람살라이고
작은 언덕주변이 맥그로지 간지,
이 앞은 다람콧으로
희말라야 삼나무 숲길을 따라
외길로 오르기를 3시간
그러면 여기 Triund산장에 도착하게 된다
Triund라는 밝은 글씨는 지워지고
해발 2,842m라는 글씨가 그나마
남아있다
안개구름에 가리운 산이
Indra Hara 이다
맥그로지 간지에서 산길로 걸어 한 시간,
다람살라에 있는
티베트 도서관에 들어서면
그들이 중국을 탈출해나오며 갖고온
다양한 자료들을 접할 수 있는데
이곳에는 티베트 망명정부
여러 기관들이 들어서 있어
세계를 향한 구원의 문을 열어놓고 있다
(2004.6.)
I'm here Mcleod Ganj |
|
How are you? I ‘m fine. Feeling good. and you?
I’m staying in Mcleod Ganj(known as Dharamsala)
Last Tuesday midnight arriving Delhi Int’l Airport (32C)
I am arriving here by bus for 13 hours .
from Delhi to Mcleod(513km)
Road condition is not so good, limited 40km.
Wild driver continued blow horn “bbang bbang”
weather is hot. No air conditions. So I wet a sweat.
But reached here, I am satisfied.
Like a Switzerland atmosphere,
rural districts Mcleod Ganj elevation1,770m.
Monsoon is beginning now.
So everyday Drizzle(a fog rain).
Over the high mountain covered white snow,
but rare view. Always covered clouds or fog.
Mcleod Ganj is the headquaters
of the Tibetan government in Exile and the home
of the 14th Dalai Lama
( not Mr, His Holiness).
Last Friday I watched the His Holiness Dalai Lama
with sightseeing foreigner,
in front of his resident gate,
over the window his limousine,
he come back home from Ladakh
Here is Tibetan place( Indian is few)
Have a breakfast Tibetan Buk Lek (like a ho ddog)
MoMo(dumpling) for lunch,
Tibetan Thukpa(guk su) or Bog-En-Bab at diner.
Everything is fine.
So stay here a month more at least.
I will go back home [Sil sung] not [Si sung]
take 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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