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약속
가을이 되었으나 빈 벌판에서 한 알 볏날도 거둠 없는 부끄러움도 부끄러움이지만 서른 해 넘이도 빈 영혼의 항아리를 안고 수수깡처럼 허허히 서 있는 저들의 벌판에 와서 우리는 날마다 그 곳을 향해 밀항密航을 꿈꾼다
낱알의 되만 가지고도 분수分數를 알고 오른손을 들어 바른손을 익히면 되는 거지 그들 손에 국기처럼 흔들리는 주걱들, 그 흩날림은 이렇게도 죽이고 저렇게도 죽이고 찢어 죽이고 쳐서 죽이고 쏘아 죽이고 그리고도 저리 남아 내연內燃하는 몸짓, 몸짓은 이 가을 무엇을 말하는가
못 볼 일이네. 만민萬民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사람이 시정市井의 무리보다 못한 짓을 하다니 어지러운 시절 갈잎은 언덕마다 이리저리 쌓이는데 참으로 시방은 울고 싶어지는 나이가 아닌가
우린 모두 떠날 일이네 새경길 머슴이 목발을 벗어 던지듯 그깐 인욕의 굴레는 벗어 던지고 그래도 이 가을 아침에 그대를 부여잡는 산천이 있거들랑 형제兄弟여 그곳에 그대의 청춘을 누이고 이 가을, 그 청춘이 꿈꾸는 약속約束을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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