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편지와 워드 프로세스
50년전 2월 이 무렵 대학을 졸업하고
공군사관후보생으로 들어간것이 3월.
그 해 임관을 하고 처음 配屬地가 烏山飛行場이었는데,
쑥고개 혹은 松炭이라 일컫어지는 그곳은
양색시들이 즐비하고 양코배기들이 가득하여
異邦人촌을 방불케 하는 그런 곳이었다.
거기서 少尉에서 中尉를 나는데, 동기생들이 여나므명.
그 중에는 헌병장교도 있어서
그 친구가 무슨 戰利品처럼 두루마리 하나를 우리 앞에 내 놓았다
지금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겠으나
維新治下였으니 모든 게 감시되고 통제 당하던 때,
한 병사에게 온 연애편지는 무료한 장교들에게는 좋은 읽을거리였다
兩面罫紙를 연이어 쓴 두루마리는 몇 날 며칠을 썼는지
面마다 잉크색깔이 다르고 필체도 달랐는데,
어찌나 글씨가 유려하던지 부러움이 절로 나왔다.
그들이 지금 한 지붕 밑 가족으로 살아가는지는 알 수가 없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
그러니 그들이 갈려 산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은 없다.
첫사랑은 누구나 홍역처럼 하고 가지만 다만 흔적일 뿐,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들 살아간다.
아내는 내가 中尉때 5월 축제에서 만난 사이.
나도 제법 편지를 썼고 그 사람도 편지를 보내오고 하여
지금도 그 묶음이 있는데 당시로서는 그것이 유일한 이음매였다.
그 후로는 편지 같은 것을 쓸 일도, 써 본 일도 없이 여기까지 왔다.
감정의 변화가 아니다.
휴대전화에 이메일이 그 자리를 대신해 준 시대의 변화다.
사부님이 시골살이를 좋아하신다니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이제 두분 드실 농사나 지으면서 예전 연애시절로 돌아가 알콩달콩 사실 일만 남았네요. 이제 이가 슬슬 말썽을 피우나요? 아침에 자고 일어나자마자 이를 딱딱딱 부딪히는 운동이 좋다고 하던데요.. 저도 자꾸 까먹어서 실천을 못하고 있습니다만.
기침감기가 두달째. 오랫만에 본 지인들은 얼굴이 반쪽됐다고 걱정을 해줍니다. 저도 용문에 쬐그만 농가주택을 마련했어요. 흙 가까이 살면 자잘한 병들이 사라질 것만 같아서 간절하게 소원을 했었지요. 고질인 류마치스도 거기 가면 다 나을 것입니다. 밭에 뭘 심어야할지 어떻게 언제 심어야할지. 할 줄 아는 것은 하나도 없는데 궁리만 무성합니다. 요즘은 이런 궁리 저런 상상 하느라고 즐겁습니다. 며칠 뒤면 흙에게 신고식을 하고 뒷산에 올라 산신님께 술도 한잔 권할 수 있습니다. 산신님은 제가 녹일 자신이 있는데 동네분들과는 어떻게 친해져야 하는지 은근히 걱정이 됩니다.
식구들도 있고 판소리 때문에라도 계속 거기 머무를 수는 없고 왔다갔다 해야 합니다. 우리 댕기가 신나게 뛰어다닐 걸 생각하면 제가 다 벅차올라요. 똘이하고 댕기녀석 갑자기 팔자 확 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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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 구례로 내려 왔다.
이 때쯤
아내는 사부가 되어 있었다
여기는 겨울 바람이 차다 물이 맑고 공기가 좋다는 것도, 겨울에는 찬 바람으로 돌아오고 살면서 나라고 어찌 잔걱정이 없겠는가, 마는 녹녹치 않다는 시골 생활 여기까지 잘 오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물음 없이도 안다. 댕기 또한 그러하리라는 것을 |
내려온 지 1년도 되지 않았던 그 해 12월.
잘 지내시는지 묻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잘 지내시겠지, 했습니다. 잘 지낸다는 것이 이러저러한 일과 번뇌를 가슴에 담아 세월 속에 희석시키는 일이라면 저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이 밖으로 난 길을 내 안으로 돌리는 일이고 그립고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건 내 안의 결핍임을 새삼 깨우쳐 가고 있습니다. 나이들고도 깨닫지 못하고 깨닫지 못해 행동에 변화가 없으니 그저 나이듦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작년부터 극심하게 삶의 의욕을 꺾어놓던 육신의 통증이 요즘은 휴전 제의를 해옵니다. 지팡이에 의지해 과천 산림욕장 같이 야트막한 산은 다닐 만 하니 생각하기 따라서 축복 아닌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 생각 돌이키기 어려움이지요.
댕기는 건강합니다. 12살, 꽃다운 나이지요? 나이가 나이니 만큼 조마조마해 하는 제 마음과는 상관없이 잘 먹고 잘 크고 있습니다. 어느 생명이 이렇게 볼 때마다 사랑스럽고 예쁘고 미안하고 안쓰럽고 할까요. 사랑하는 일이 아픔을 만드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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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봄 민들레 꽃씨처럼 바람에 실려온 E메일은
고적하다 할 시골 생활에 우군이 되고 원군이 되어 주었다
지내는 일상이 메일에 담겨 하늘로 날아간다
산에 진달래 볕 좋은 자리에 반쯤 피어 그냥 갈수 없었다 한 가지 뚝~ 나뭇짐 위에 얹어 오는데 벌 한 마리도 등짐에 함께 지고 왔다.
오늘부터 여기서 산수유꽃잔치가 열린다 정월보름부터 연습에 들어간 이웃 마을 농악대는 산수유를 배경으로 화보에 담겨 나왔다 토요일 낮에는 산수유꽃길 걷기도 있다. 밤이어도 좋을 꽃길 이번에 내 걸린 축제의 주제는 이렇다
영원한 사랑을 찾아서 |
[바꿈살이]나 다름없는 시골 생활
살림은 차렸으나 모든 것이 어설펐다.
군불을 때야 했고
비라도 온다하면 신발을 들여놔야했다.
그러더니 수도가 말썽을 부렸다.
[도랑물]을 길러다 쓰는 것도 한 두 번,
아내에게 안쓰러운 일이었다.
내가 이런 고초를 아내에게 지웠구나...
사업소에다 전화를 했다.
그는 바로 와 주었다.
다시 짐을 싸서 서울로 갈거라는 소리가 아내에게서 나왔다.
그래서였던가.
얼마되지않아 수도가 고쳐지고 짐을 싸는 일도 없어졌다.
이 때의 강렬한 인상이 오래 고마움으로 남았다.
내외간에 서로 교유하는 사이로 시골생활이 안착되어가면서
그가 차마고도 여행길에 따라나섰다.
아내가 다녀갔던 길을 이번에는 실크로드까지 이어냈다.
그는 차에 앉았다하면 잠이드는데
옆자리의 부인은 곧곧하게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켜보고 있어서
같은 풍경, 볼것이 무엇있다고, 하였더니
‘제가 언제 다시 이런 풍경을 보겠는가요’
그러면서 여행길을 담아보던 모습이 지금도 선연하다.
그는 여러 직위를 거쳐가면서 나보다는 10년 이상을 더 현직에 있었다.
그후 여러차례 여행길에 동행이 되어주었다.
그와의 교유가 이어지면서 鍾子期와 伯牙가 아니더라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정도는 되어 있었다.
好事多魔여서일까
말해 주지 않아 모르고 있었지만 그는 스스로의 발목을 잡히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E 메일을 쓸수 없는 곳에 가 있어서
우표를 붙인 편지를 보내왔다
인도 델리공항에서 送舊迎新을 맞이 하고
25일간 네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래킹을 다녀왔더니
그의 손편지가 와 있었다.
받고 나서도 바로 應答을 하지 않은 채 며칠이 지났다.
손수 써서 보내온 손편지, 손편지로 응답을 해야하겠으나
워드 프로세스를 통한 이 편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추세여서
앞으로도 손편지를 쓸 일은 없을 것 같다.
첫 마디를 무슨 말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네. 그런데 여전히 좋은 문구가 떠오르지 않는구먼 인사말을 한다고 해도 , 그래 잘 지낸가, 라고 할 수도 없고 추운데 고생이 많겠네, 라고 한들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우선 자네에게 이해와 관용을 구할 일이, 뒤 이어 온 年賀狀까지 받고도 벌써 몇 달인가 그것도 또박또박 서서 보낸 손 편지에 나는 그렇지를 못하니. 이 또한 미안한 일이네
쓴다, 쓴다 하면서도 이리된 것은 전혀 나의 불성실함의 물증이며 무기력한 생활에서 온 반증이라네 아내는 때때로 편지 답장을 했느냐 채근을 하는데 그 때마다 나는 밀린 방학숙제를 미루고 미루다가 어느 한 날 한꺼번에 한 달 치 일기를 복기해 내는 그런 식으로 오늘 ‘밀린 숙제’를 하는 것이야
중부지방에 쌓인다는 눈은 여기까지 바람을 타고 날리는 바람에 앉은뱅이 책상 앞에 앉을 시간이 났었네. 그러지 않았다면 아침에 큰골로 올라가 산소 터에 겨울땔감을 모아 쌓기를 세 차례, 그래놓고 가볍게 한 짐 지고 내려와 오후 나절은 농장으로 가서 소득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몇 시간 하고 오는 그런 일상 속으로 들어갔을 터인데 흩날리는 눈이 자네 앞에 다가서는 바람이 되었네
그러네 나는 기껏 써봐야 한 줄 글로 밖에는 쓸 것이 없는 단조로운 일상이어서 하루가 짧고 그런 나에 비해 오는 12월까지 기다려야 하는 자네의 긴 하루는 길고도 길지 않을까 한데 자네 거기 있다고 해서 나와 하등 다를 바가 없네.
별 것 아니네, 세상, 자네는 그런 생각 안들던가 별것 아닌 세상을 별것인 양 생각하다보니 살기가 힘든 것 그걸 안다싶은 때가 되니 벌써 이 나이가 되었네.
지난 12월 19일 송년 모임을 가지면서도 어느 누구 자네 이야기를 드러내지 않았네 앞으로도 그럴 것이 우리 중 그래보지 않은 자 아무도 없으며 다만 드러나지 않았을 뿐 그 일로부터 자유로울 사람 아무도 없는 것이어서 자네가 囹圄의 몸이 되는 순간 우리로부터 赦免이었네. 나오면 對人忌避症에 빠질 일도 절대 아니라네. 멋쩍고 보기 민망하여 리모컨이나 쥐고 주전부리나 하고 있을 일은 아예 꿈도 꾸지 말게
우리가 꿈꾸어야할 미래 여행아니겠는가 자네없는 동안에도 나의 放浪癖은 계속되어 茶馬古道, 실크로드를 다시 가면서 자네 내외와 한사장 함께했던 추억을 상기하곤 하였네 다시 한 번 그런 추억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산다는 게 실상 추억만들기 같은 것이어서 나는 올해도 어디 어디를 가겠다는 계획으로 내 여행 바켓리스트를 채워보려고 하네
작년에는 山林組合에 나가 일당벌이를 하여 여행경비를 마련했는데 1,200만원 정도 노동으로 번 돈, 그 돈으로 아내와 둘이 배낭메고 한 달간 마추픽추로, 우유니소금사막으로 다닐 수 있었던 시간을 자네 내외 하고도 누리고 싶네 어디 그 뿐인가 한 달 전에 최성현, 장근종, 박종운, 장용욱 그리고 곡성군 사무관출신을 데리고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트래킹을 25일간 다녀왔는데 자네하고도 그 길에 다시 설것이니 그리 아시게 그러니 고단히 여기질 말게, 우리 앞에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다가오기 위한 이 단금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