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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의 관림과 용문석굴 2017

강정순 2017. 12. 26. 18:38

낙양洛陽에 조조가 관우의 머리를

 

매장한 곳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관총關塚이라 불렀습니다.

 

明代에는 묘라 불리다가

 

淸 道光 관림關林으로 바뀌어 부르게 됩니다.

 

일반인이 에서 로 불린 것은

 

드믄일입니다  




공자의 孔林에 이어 관림으로 불린 것은

 

중국인들의 관우사랑을 옅볼 수 있는 일입니다.





배낭여행에서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것이

 

먹는 일과 이동일 것입니다

 

광대한 중국대륙이동은 열차가 편리하지만

 

한달 전부터 예매를 시작하는 중국에서

 

좌석표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터넷예매에 자동예약기까지 등장했으니

 

굳이 줄을 서지 않아도 됩니다.  






 

 

감숙성의 난주에서 하남성의 낙양까지는

 

먼 거리입니다

 

낙양을 가기 위해


난주西站에서 낙양용문으로 가는

 

G2028 고속열차를 탑니다

 

 

 

 

08:15-13:21 二等座 349

 

정시 출발에 정시 도착

 

한 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안정감과 속도감 그리고 편안함까지 갖춘

 

최상급의 열차여행입니다

 

 

 

 

 

 

 

낙양용문역은 시 외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곳까지 다양한 노선의 버스들이 들어 옵니다

 

낙양역으로 가는 버스는 28입니다.

 

44정거장

 

67번은 관림묘

 

71번은 용문석굴행입니다만 10여분 기다려보다

 

아니다 싶으면 67번을 타면 됩니다

 

우리는 71번을 기다리느라 한 시간을 허비합니다

 

 

낙양역으로 도착하였을 때는

 

K81번 버스를 타면

 

종점이 용문석굴입니다





주말에는 무료버스운행도 하는 모양입니다

 

우리는 관림'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용문대도관림로구'에서 하차합니다

 

관림'문은 어디서나 눈에 띕니다.

 

버스에서 내린 곳에서 관림문을 왼쪽으로 두고

 

길을 건너 100m 쯤 가면 가가주점이 나옵니다  

.



1층에는 谷子牛肉面집이고

 

 

2층이 빈관입니다

 

표준칸120

 

 

이 숙소에서 다시 관림문으로 가서 안쪽 길을 따라

 

가다보면 오른 쪽으로 골목시장과 상가시장이 나오는데

 

도로확장 공사로 휀스가 쳐진 곳을 우회하면 됩니다.

 

관묘의 입장료는 40  





관림에서 용문석굴로 가는 시내버스가 있습니다.

 

용문大道관림路口

 

1.5하는 812층버스를 타고 일곱 정거장

 

그러면 용문석굴 풍경구에 닿게 되는데

 

버스의 회차점이기도 합니다






 

시내버스로

 

접근이 용이하다는 것이 장점입니다





용문으로 가는 길은 이전보다 훨씬 앞쪽에다

 

매표소를 설치해 두고 있어

 

한량없이 걸어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나라 해남이나 여수시와 같은

 

위도에 자리하고 있어

 

여기서는 겨울이 더디 온듯 보입니다.

 

1210  




이곳까지 걸어와서 보면



광장 왼쪽에 초심을 잃지 말자는

 

의지의 글이 이렇게 드러나 있는 것을 보며  


 


이 곳을 통과한다 해도 용문은 아직입니다

 

입장표는 100

 

이 문을 나서 한 참을 걷게 되면




용문에 이르게 되는데

 

2001년에는 81번 시내버스를 타고 와

 

다리 건너 향산사까지 갔습니다  




어떤 연유로 우왕의 연못'이라 이름하였을까요




이곳을 다녀간 명망가들

 

누군가로 부터 잊혀진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쓸쓸한 일입니다

 

그러지 말라고 연을 이어 갑니다






사진으로 보면 그럴 듯한 이 강은 이하'입니다

 

파리의 세느강이라 해도

 

곧이 듣겠습니다  





이제 1700년 전부터 선비족들이

 

화강암벽에 깎아 만든 석굴을 만나게 됩니다




 

異敎라는 이유만으로 훼손당한 유물들

 

나와 다르다는 것만으로

 

배척당하고 이단시 여겼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봉선사의 이 대불은 측천무후를 닮았다는

 

설명이 따릅니다  




이제 다리 건너 동쪽 석굴로 갑니다

 

100위안 입장표를 제시하면 펀칭을 해 줍니다

 

향산사와 백원을 들어 갈 때도

 

이렇게 해 주는데

 

네 시간 정도 걸리는 구경거리입니다





동쪽의 석굴들을 다 둘러 본다면 말입니다

 

자유여행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여기서 보면 지나온 서산석굴들을

 

조감해 볼수 있습니다

 

강건너 봉선사도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님의 눈에 비칠 내가

 

어떻게 드러날지 두려운 것입니다  







한 때 날고 뛰었던 젊음은

 

초로의 할아버지로 자리바꿈을 한지

 

이미 오래   





향산사로 올라갑니다



백거이를 비롯하여 아홉 늙은이가 모여

 

음유하며 시를 읊었다는

 

향산사에 올라보면





모든 법이 허깨비같고

 

나고 죽음이 마찬가지로

 

법신은 자재하여 원통했다'

 

자재원통'의 저 편액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이제 백원으로 갑니다

 

당나라때의 음유시인 백거이의 흔적을 따라

 

가는 길은 정원으로 잘 꾸며 놓았습니다

 

그래서 白園'입니다  





비파봉은 백거이의 시

 

비파행'에서 이름한 것입니다

 

이 능선위의 이하강을 내려다보는 곳에

 

그의 묘가 있습니다






29살 최연소 진사에 오른 그는

 

3,840수라는 놀라운 창작활동을 하게 되는데

 

창작 그 자체를

 

삶의 보람으로 여기다 간 사람입니다

 

詩仙 李白이 앞섰고

 

詩聖 杜甫가 뒤를 이은 뒤

 

그들 사후에 세상에 와 남긴

 

장한가'

 

비파행'

 

아직도 읽히고 있습니다  


 

 

클릭하면 동영상
















다음의 글과 사진은

2001년 6월 중국문화기행 당시의 것입니다


낙양시 남쪽 13Km,

이허伊河의 양쪽 벼랑에 석굴이 뚫려있다.

강이 산을 둘로 나누었는데,

동쪽 산이 香山이고 서쪽의 산이 龍門山이다.

강은 흐르다 멈추는가 싶은 伊河.

81번 버스에서 내려서면 강을 사이에 두고

용문석굴과 백거이의 유적이 공존한다.
北魏가 다퉁大同에서 洛陽으로 천도를 한 것은

1,500년전 일이다.

대동에는 雲崗石窟을 만들었는데

낙양으로 옮기고 나서도

그 외곽인 龍門에 석굴사원을 만들었다.

말하자면 용문석굴은

운강석굴의 결정판에 해당한다

 

 

 

龍門의 돌은 단단하다.

그래서 조각이 가능한 것이다.

鳴沙山에 있는 돈황의 돌은 깨지기 쉬워

석불을 만들 수 없었다.

대신 벽화를 그리고

다른 곳에서

불상을 만들어 와야 했다.

용문이 돈황과 다른 것은

에 있는 돌에 불상을 실제로 새겼다는

점이다.

그 대신 돈황처럼 화려한 벽화는 없다.

돈황이 중국회화의 보고라면

용문은 중국조각의 寶庫라할 수 있다.

용문의 대표적인  걸작품은 奉先寺다.
이 곳 최대의 석굴.

비로자나 불상은 높이만 17m가 된다.

則天武后를 본 떠 만들었다는 소리도 들린다.

그 시대에는 용문에서 석굴을 만드는 전성기였다.

8세기 玄宗에 이르러서는

점차 불상을 만드는 일이 드물어졌다.

그 무렵에는 西山의 벼랑이 석불로 가득 차,

더 이상 조각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종 때는 東山에 석굴을 만들었다.
香山이라 일컫는 동산에서 은거하면서

말년을 보낸 白居易도

용문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을 만큼

龍門과 香山寺는 부르면 소리가 가 닿는다.

 

 

 

건너편 香山寺 아래쪽에 바이위엔白園이 있다.

작은 정원인 이곳은

白居易의 무덤이 있는 곳이라 해서 찾아갔다.

는 용문의 풍경을 사랑했다.

18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낙양에서 살며

불교에 심취하여 향산사에서 지냈다.

그런 뒤 자신이 아끼고 좋아했던

용문의 향산에 묻혔다.
묘지의 지형이 비파를   닮았다하여

琵琶墓라 부른다는 데

이것은 그가 쓴 '琵琶行'에서 따온

牽强附會견강부회같이 보인다.
白公祠는 香山九老臺라 불리는 곳이다.

백거이는 만년에 낙양의 아홉 노인과  더불어

賦詞吟詩부사음시하며 보내는데,

'尙齒會'상치회라 하여 이들의 평균 연령이 74세,

그 중 李奭이석은 136세였다.

白居易는 그의 字를 넣어

白樂天으로 더 알려진 인물이다.

이백 두보와 함께 당나라 3대 시인인 그는

'長恨歌'와 '琵琶行'으로

더 사랑 받는 시인이다.
'술을 마시려는 데 비파도 없다'고

擧酒欲飮無管絃

탄식했던

그의 무덤에  잔술도 붓지 못하고 말았으니

이런 노릇이 다시없다 (20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