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생활

노인은 하나의 박물관입니다

강정순 2014. 6. 8. 08:42

 

오늘이 芒種입니다.

 

24절기 중 아홉 번째에 해당하는 절기지요.

 

이라는 말은 벼처럼 까끄라기가 있는 곡물을, 은 씨앗을 의미하는 데 씨앗을

 

뿌리기 좋은 때라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선산에 떼를 입히고 하던 날이 芒種입니다.

 

그런데 오늘이 국가적으로는 호국영령을 기리는 顯忠日입니다.

 

1956년에 현충일을 제정할 당시 6.25를 상기하고 역사적인 풍습을 고려하여

 

그 해의 망종일인 66일을 현충일로 설정을 했다고 그래요.

 

구례군에서도 오전에 추념행사가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참가하셨던 분을 오늘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광평1길에 살고 계시는 李鍾銀 어르신을 소개해드리면

 

1929년 우리 마을에서 태어나 스므 살에 여순사건을 겪으면서

 

6.25전쟁에 참가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이 분을 통해

 

해방공간속에서 우리 마을이 어떤 위치에 있었으며

 

우리 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전해 듣고자 합니다.

 

노인은 그 자체가 하나의 박물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그 때를 말씀듣고자 합니다

 

 

   

 

   

 

제가 난리 통에 태어났거든요. 그 때 아버지가 이서기를 봤다던가.

 

그러더라고요

 

 

 

이장을 봤을거여

 

 

 

한번은 위재까지 짐을 져다주고 실컷 얻어맞고 그랬다는 말이 기억 납니다.

 

아재가 여순사건때 동네에서 뭘 하고 있었는데요?

 

그 때 학생이었어요?

 

 

 

여수사건때는 졸업했제

 

 

 

여순사건이 여름에 났으끼다, 가을에 났으끼다?

 

 

 

가을이제. 나락 다 베고 보리 갈고 그때 그랬거든

 

 

 

그 때는 마당머리집에 살았던가요?

 

 

 

그때는 태석이 집에 살았제. 농사짓고

 

우리 집이 모두 7남매인디 내가 장남이제

 

 

 

 

 

청천학교를 다녔지다?

 

 

 

12회로 일정日政 때 졸업했고

 

 

 

그러면 졸업하고서 동네에만 계신 거네요.

 

 

 

외할아버지 제사를 지내려고 어머이를 따라 오미리로 가고 그랬었는데

 

집에 오려고 하는데 이 사람들이 아침부터 문수리로 들어가는 거라.

 

남원서 군대가 내려오고 그러니까 이사람들이 문수리로 들어간 거라.

 

보리 갈고 그러던 땐디 계엄령 때라 함부로 못다녔제.

 

이북에서 밀고 내려온다고 했는디 안 오니 14연대가 탈영병이 된 셈이제

 

밤에 14연대 군인들이 도망 나오고 그랬는디

 

낮에 숨어 있던 도산오센집에서 잡혔어.

 

그러자 보리 갈고 있는 부락사람들을 나오라는 거여.

 

반란군을 감춰줬다고.

 

도산오센집 사람들이 다섯인가 하고 하사에서도 젊은이에서 50층까지

 

열사람이 잡혔어.

 

나도 같이 구례경찰서에 유치가 됐는디

 

총살시킨다고 나오라고 하는 거여.

 

여남명을 쓰리쿼터에다 빽빽이 태워 가는데 생각해보니

 

우리가 잘못한 게 없는 거여.

 

우리 마을에서 그랬다는 거 밖에 없지

   

죽어도 고향에서 죽었으면 좋겠는데 곡성을 지나더라고  

 

 

손을 묶였는가요?

 

 

묶였제. 광주를 가더니 100명 이상 들어가는 비행장 콘세트건물에다

 

우리를 풀어놓는디 조사도 안 받고 한 달 이상을 놔둬.

 

주먹밥 조금 먹여주고. 화순 담양 그 근방 부락사람들 좌익들 밥도

 

해주고 동조했다고

 

콘서트에다 겨울에 재우는 데 사람 훈김에 춥고 그러지는 않더라고

 

조사를 받는다고 해도 부역을 했다고 하겠어.

 

군인들이 가자고 해서 왔다고 했더니 그렇게 적더라고

 

11명이 무죄석방으로 나왔제

 

보리 갈다가 잡혀간 뒤로 세수도 안 했제 반란군처럼 보이제

 

하사에 삼식이라고 살아 우리 또래. 전에 잘 살았어

 

제 성이 선생이고 작은 성이 내 동창인디 총살당하고

 

다리가에서 보초가 섰는디 증명보자고 그러는 거여.

 

군인들이 데려가 한 달 열흘 만에 온다고 그랬더니

 

피난 갔다 온 거요? 그래

 

무슨 소리냐 했더니 사람들을 죽여 논 시체가 즐비흔거여.

 

 

 

집에 왔는디 14연대가 밤에 동네로 들어와 먹을 것을 털어가는 바람에

 

마을마다 수직을 하거야

 

반란군이 들어오고 안 오고를 지서에다 알리는데

 

만나면 반란군 짐 져다주고 그래야 해

 

저녁마다 보초를 섰제.

 

반란군이 전선을 짤라 버려서 스기나무 전봇대가 베어지면 근무

 

못했다고 총살시켜버리고 그랬어. 머슴 산 사람이 많이 죽었어.

 

영선이라고 귀환동포인데 일본에서 뒷내오센 동생하고 같이 나와

 

가지고 이북이 고향인디 고향은 못가고 머슴살이를 했제.

 

새경도 많이 받았을 건데 보초서다 죽고 말았어.

 

 

지장오센도 전봇대사건으로 죽었지다?



반란군이 전봇대 자르면 재판이 뭐여, 게엄령하라 어디 가서

 

하소할 데도 없어

 

그 때 보초도 죽창가지고 섰을 텐데요?

 

, 대창 들고 나갔는데 어떻게 대응 해

 

큰골에서도 사람이 죽었지다?

 

 

잿몰랑 가는 길하고 큰골 가는데 거기서 큰골로 10미터나 올라갔나.

 

바로 거기서 한명이 즉사했어.

 

동네사람들이 묻어줬겠네요?

 

 

나뭇길인디 묻어줬지

 

서남쟁이에서도 죽었다며요?

 

 

몇 명인지는 몰라도 죽었어.

 

내동할매집에도 거기서도 반란군이 들어와 생포했지

 

청내사람이더라구. 지방폭도지.

 

 

 

그러다. 한청무장대로 들어갔제. 군대 안 갈려고 들어갔는디

 

지방 의경으로 마산지서에서 근무를 했제

 

 

그럼 한들아짐하고 결혼 전이던가요?

 

그렇제.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총 가져다 경비하고 아침에 반납하고

 

그렇게 했제.

 

하사下沙는 용두龍頭에 감시초를 두고 있었는디

 

차석次席 말고는 다 의경들이라.

 

낮에는 출동하고 밤에는 야간근무하고

 

하사감시초로 발령후 근무는 상사로 다녔제

 

하동이센집 골목에도 보초를 섰는디 반란군이 쏴서 그런지

 

용두 정국선이라고 총에 맞아서 쓰러져있어. 반란군이 쏘고 갔는지

 

자기가 오발을 해서 죽었는지 가슴에 딱 한발 맞고 죽었어.

 

보초보다 그런 일을 당했다니까

 

 

그 때 평전야파리에 보초막이 있었지다?

 

보초막을 지었다가 서까래는 걸었는데 우는 안하고 그랬제.

 

용두감시초 몰랑에 상하사 오미리 용두 4개부락에서 보초를 서고

 

그랬는디 그래도 털어가더라고

 

해 안 져서 정찰을 하고 가

 

그리고 먼저 와서 잠복하고 있으면 우리가 못 들어가

 

공포만 쏘제

 

냉천지서에 와서도 털어가더라고

 

 

마산 지서가 불타버려서 그랬지다?

 

 

진개목(金監役)집에서 고아원을 했는디 거기다가 지서를 지었제.

 

  

우리 동네 소도 냉천리다 매 놓고 그랬다면서요?

 

 

그렇제. 하사는 감시초監視哨 밑에다 식량을 두고,

 

그러면 동네건 털어가도 거기건 못 가져가

 

돌라먹고 사는디 몇 조금이나 가겠어?

 

맨날 잡히고 그러지

 

지서에 2,30명 있어도 부락 나가면 지서도 습격당한다고

 

상사는 장날에 오네. 냉천에서 먹을 양식만 가져다 놓으면

 

그것도 털어가.  

 

 

안 내놓으면 죽였을까요?

 

 

죽이지는 않고 불당佛堂몰까지 짐 지어 날리게 하고 그러면 고생했다고

 

돌아가라고 하제.

 

한번은 전라남도에서 구례 곡성 남원 같은 서남지구 사람들을 차출해서

 

백운산으로 소탕을 났는디

 

골짜기가 깊더라구. 거기를 포위를 했어.

 

어떻게 포위 됐냐면 여자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혼자라

 

가끔 빨래도 해주고 왔다 갔다 하는 걸 군인들이 알아챘어.

 

그 날 저녁에 어느 부락서 털어 간 바람에 피곤할거아녀.

 

자는 통에 경찰국에서 포위를 했제.

 

507부대라고 14연대 반란 뒤에 임시로 조직한 곡성 부대가 포위를 하고

 

우리는 능선을 타고 올라갔는 디 총소리가 탕 나더라고.

 

포위를 하고 쏘니까 살수가 없어.

 

50명을 사살하고 그 시체를 다 끄집고 내려왔네 들판으로.

 

생포를 하나 했는디 전남도당위원장이래.

 

보니까 청내 우리동창 성이더라고.

 

성은 전남도청에 요직에 있는디 끝터리 동생 둘만 붉은 물이 들어가지고.

 

원래 청내부락에 선태석이라고 공산주의 골수분자가 하나있어.

 

6.25가 나서 이북으로 갔다더라고.

 

그때 전도사 한분이 운봉골짜기에서 양봉을 했는디 선태석이가 거기

 

피란 왔다 그러더라구. 누구말 들으니 이북에서 간첩으로 보내서 왔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선태석이가 구례병원에 입원을 했는디 달러돈을 가져왔어.

 

병원에서 심부름을 시키는데 아주머니한테 달라 돈을 준거야.

 

그 여자가 순경마누라였어. 이상하다고 남편에게 연락해가지고 잡혔어.

 

얼마 못살고 죽더라마. 고생을 해가지고

 

그러다가 내 나이 스무 두 살에 6.25가 났제.

 

6.25가 나니 경찰들은 다 도망가고 없어

 

만만하게 의경들만 경찰들 보조해줬다고 걸리게 생겼는디

 

그 사람들은 모르더라고 신사쟁이고

 

지방폭도들이 드러내지.

 

어쩔 수가 없제. 딴 세상이 돼 버렸잖어

 

그때도 문수골에 들어간 14연대 반란군들이 살아 있었을 거예요.

 

아먼. 그런 깨 지방폭도들 좌익들이 산으로 들어간 이가 많고

 

부산은 얼마 안 남았다고 하고 인공人共치하가 된 것이여.

 

1차로 의용군에 들어가 버렸네.

 

우리 동네서 간 사람들이 우체국 다니다 죽은 그 성하고 탁재선이 형.

 

넘의 집 살다가 여러니 갔어.

 

30명이 갔는디 1개 분대에 댓명 씩 배정을 해.

 

그래갔구 밑으로 내려간 거여

 

뭣도 모르고 1차로 들어간 거지.

 

군청 앞에 뭔 학교가 있었어. 청천학교 4년 공부하고 거기 가서

 

고등과高等科라고 2년을 해야 6년 완전히 졸업하는디 일본자녀들 다닌

 

학교라

 

그 자리에 가니 구구식 일본 총하고 실탄 100발 주드라구.

 

옷은 죽은 사람 옷을 벗겼는지 헌옷을 지급받고 야간으로 내려간 거여

 

비행기 공습 때문에 낮에는 꿈쩍도 못했제.

 

삼천포까지 갔는디 오늘은 전장터에 안 간다고 해.

 

사천비행장에 도착했는디

 

밤에는 실탄이 얼마 안날라오던디 분대장이 맞아 후송하더라구.

 

날이 새서 전방에 집에 넣는디 보니

 

첨엔 비행기가 뱅뱅 돌다가 총을 쏘고 폭탄을 던지지 당할 수가 없어.

 

여기보다 나락이 늦었는가. 나락 논에 숨었는디

 

기관포로 쏘지 비행기에서 폭탄 내리지 못살아.

 

난 도로에 엎드려 살았어.

 

총알 한방이 나한테 날아온 게 대검에 맞았어.

 

이북대검은 돌가지창처럼 뾰쪽해.

 

쇠가 좋은 건지 휘어지더라고. 대검에 안 맞았으면 난 지금 없을텐디

 

 

(아들 이성원) 아버지는 키가 작아 안맞은거라고 내가 맨날 그래쌌는디

 

 

고지高地에서 소나기처럼 집중사격하는디

 

우리는 들에 앵겨서 총을 쏠 수가 없어

 

해가 넘어가기만 기다렸제.

 

다 죽었을 거다 그런 참에 기관포도 덜 날아오고 해가 넘어가는디

 

미군들이 나오라고 그래. 100미터 전방에서 누가 대응할 사람이 있어.

 

그 때 포로로 잡혔으면 고생을 했을 거여.

 

해가 넘어가서 일어나 보니 하나도 산사람이 없어

 

나 혼자 도로를 나오니 전선줄이 칡넝쿨처럼 찼네.

 

어떻게 헤치고 나왔는지 몰라.

 

200미터쯤 나오니 인민군이 배치가 돼 있더라고.

 

그 때는 차가 없으니 구루마로 포탄을 실어 나르고 그러던 땐디

 

총소리가 빠방나더라고.

 

산으로 가면 잡히겠고 잡히면 또 가야하고.

 

안 되겠다싶어 강을 따라서 진주晉州 아래 와보니

 

둠벙에 붕어들이 하얗게 떠 있어

 

포탄을 맞아가지고.

 

집은 다 폭탄에 날아가고 불나 버리고 바깥에 겉보리를 쟁여놨더만.

 

안 맞은 건 그대로 있고 맞은 건 재가 돼 부렀어.

 

군복을 입고 다닐 수 있어야제  

 

 

 

군복이 인민군복이었지다?  

 

 

그렇제. 어느 집에 가보니 방에 누가 그랬는지 다 뒤집어 놨더라구.

 

학생복이 하나 있어.

 

입으면 학생인줄 알제. 머리고 열흘도 못 길어논깨.

 

신이 있어야지. 찾아보니 운동화가 있어. 마침 됐다.

 

민간인들도 다 피난 나가있고 사람이 보여 야제.

 

굴을 파고 그 안에 의지하고 사람들 있는디

 

밥좀 달라 그러니까, 한다고.

 

내려갈 때는 쌀밥에 고깃국을 먹었는데 겉보리로 지은 밥이라.

 

난리 통에 정미소에서 찧은 것도 아니고 도구통에 요상하게 찧은 거라

 

하루를 굶어논깨 배가 고파서 묵제 그래도 꿀맛이라.

 

진주 온깨 B-29세대가 진주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려서

 

부상자들을 정제나무 밑으로 실어내리더라고.

 

죽어도 집에 가서 죽겠다고 하동으로 오니 군 지서에서 잡더라고.

 

두 번 죽게 생겼구나 하는데 여자 둘하고 남자가 하나 있어.

 

남자는 구르마에 포탄실어다 주고 오는 길이라고 그러고

 

여자 둘은 피난 갔다 오는 길이래.

 

우리더러 반동분자라고 해 싸면서 그 이튿날 아침에 주먹밥을 하나

 

주는디 남자가 화장실 간다 해놓고 도망을 가버린거라.

 

빨갱이라고 해 쌌는디 나도 학생처럼 보이제, 여자지,

 

앞으로 협조 잘해주라고 하면서 가라고 하더라고.

 

 

 

하동에 오니 군인들이 훈련한다고 하나둘하나둘해 쌌더라고.

 

섬진강 쪽으로 해서 구례를 와 외갓집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어둑어둑해질 때 집으로 왔제.

 

그 때 간 사람들이 다 죽었어. 각 마을 마다 상하사 광평 장갑동 광평.

 

이규대 형도 그 때 갔다가 못 왔어.

 

 

시절이 여름이었을까요?

 

 

 

나락이 고개를 넘어가더라구.

 

보름이 됐는가 열흘이나 됐는가 흔깨로 지서에서 오라 가라고 그래

 

어째서 왔냐

 

몸이 아파서 왔다

 

증명을 보자네

 

전쟁 통에 증명이 어디 있겠느냐

 

그런디 나 올라온 뒤에 열흘 있으니 인민군들이 올라오더라구

 

심도열 즈그 아버지가 그 때 마을 소인으로 살았어.

 

심도열이가 아침에 간판을 떼라고 외고 다녀. 웬일인고 그랬더니

 

정찰기가 하나 날아가. 아무 거식도 없고 대응도 안하고 그러니까

 

용방으로 날아가더니만 거기서 총 몇방 쏘고는 남원으로 가더라고.

 

미군부대가 올라오는데 차가 몇 대가 되는지 몰라

 

유엔군이 올라온 거제.

 

이젠 살았다.

 

그렇게 죽을 고비를 두 번을 넘겨 산 사람이여

 

구례경찰서 안 갔으면 죽었다구.

 

광평 가랑 사이 거기서 여남명 총살시켰는데

 

어머이랑 고모랑 둘이서 나 죽었다고 다 뜰춰봤다는거여.

 

틀림없이 죽었어.

 

왜 죽였냐면 백인기가 12연대장때 남원에서 산동으로 차를 몰고

 

밤티재를 넘어왔는디

 

뒤에서 총소리가 나며 집중사격을 받아 백인기가 대밭으로 숨었제.

 

하필 연락병이 연대장이라고 불러대니 거기다 총을 갈길 수밖에.

 

그래서 백인가가 자살했다고 그러더라구.

 

그 뒤로 부역했다 싶은 사람들 잡아다 모조리 죽인거야.

 

말이 그렇지. 경찰서에 없었으면 나도 죽었어.

 

열한명이 가 가지고 한명은 붉은 물이 들어서 죽었어.

 

 

그 때 우리 동네도 빨간 물든 이가 있었나요?

 

 

오영수라고 있어

 

 

 

 

 

 

 

NOTE:

 

  • eddy  2014.06.12 18:38 
아주 흥미있게 읽었네,
그 어떤 전쟁 소설보다도 살아있는 글일세,
예전에 태백산맥과 남부군 은 읽었지만, 강이장님 선배이신 조정래 작가도 이런 인터뷰를 수없이 했을 걸세,
얼마전에는 그의 최근작 정글만리를 읽었다네
그런데 후편이 궁굼하네, 계속 이어지나
 
 
 
오늘 함양군에 있는 산청함양사건역사교육관‘이라는 곳을 다녀왔네
민간인학살사건을 기록으로 말해 주고 있는 곳.
그곳에 서서
내가 해방공간에 청년기였다면 나도 분명 빨치산대열에 합류했을거라는
가상을 하게되었네.

국가의 전 역량을 다 동원하고서도 유아무개 하나 잡아들이지 못하는,
그 많은 꽃같은 생명들을 하나라도 살려서 건져내지 못하는,
이런 나라라면
분명 나도 해방공간속에선 빨치산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을 듯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19일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제14연대가 제주 4·3사건 진압 파병 반대를 이유로 반기를 들어 여수·순천을 비롯한 전남 동부지역 등에서 군·경과 무력 충돌했으며 이 과정에서 민간인이 집단 희생된 현대사의 비극으로 기록돼 있다.

더구나 산동면 시상리에서 12연대장 백인기가 자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산동면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것은 이런 지형적인 요건이 제공한 '의심'과 '반발'이 자연스럽게
각축한 원인과 연대장의 죽음이라는 우발적 상황이 연출한 토벌군의 보복심리가 작용한 것이다


구례읍에서 화엄사로 올라가는 입구인 마산면 황전리에서는 1948년 11월 18일부터 19일 새벽까지
반군과 제12연대가 교전했다. 11월 19일 새벽 반군이 지리산 화엄사 방향으로 도주하자, 제12연대가 이를 추격했다.
제12연대 군인들은 황전리를 수색하면서 마을주민 전원을 마을 앞 논으로 데려갔다.
군인들은 약 120호 정도의 사람들 중 300~400명 정도를 끌고 가 논바닥에 꿇려앉힌 다음, 군 지휘관이 지휘봉으로
주민 17명을 지명하여 끌어냈다. 이들은 군용트럭에 실려 구례중앙국민학교로 끌려갔다. 이들 중 황전리 거주
박재동(당시 34세).장학철(장종철, 당시 21세).오기성(당시 27세).임홍규(당시 18세) 등 16명이 서시천변(서시교 아래)
에서 12연대에 의해 집단사살되었다.
또한 제12연대는 1948년 11월경 마산리 청내마을 주민들을 마을 앞 오길택의 논에 몰아넣고, 마을을 소각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인들은 주민 30여 명을 선별하여 구례경찰서로 연행하였다. 마산리 거주 박원하(당시 23세).
이태식(당시 23세).이신식(당시 18세).이창식(당시 25세)을 비롯한 연행된 주민 30여 명은 일주일 정도 반군협조
여부를 취조당한 후 서시천변(서시교 아래)에서 집단사살되었다.
그 외에도 마산리 거주 김종출(당시 40세, 마을 이장).김상곤(당시 15세) 등이 전 국회의원 이갑식의 가족이
반군에게 피살된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경에게 끌려가, 마산면 청내다리(현 마산리 하천둑) 등지에서
희생되었다. 또한 청천리 거주 오재만(당시 37세)은 1949년 2월경 군경에 의해 연행된 뒤 행방불명되었다.
마산리 거주 김정오(당시 33세)는 1949년 6월경 경찰에 의해 구례경찰서로 연행된 뒤 행방불명되었다. 마산면 희생자
중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12명이며, 마산면 갑산리 거주 엄홍섭(미신청, 당시 27세)도
1948년 12월에 사복 경찰에 연행된 뒤 사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 시은  2020.04.21 14:53
마을 소인으로 살았어, 간판을 떼라고 외고 다녀가 무슨 말이에요?
 
 
 
우선 응답을 적기에 해드리지 못함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집을 새로 지어내는 바람에 와이파이를 열수 없었습니다.
오늘에야 인터넷 접속을 할 수가 있어서
선생님의 댓글에 답을 드릴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소인으로 살았다‘는 소인의 뜻과
다음은 간판을 떼라는 말의 뜻
이렇게 두 가지를 말씀드리면
소인‘이라는 말은 下人 이라는 전라도식 발음입니다
兄을 성‘이라고 말하는 바와 같습니다
당시에는 마을마다 인민위원회가 들어서서 그런 명의의 간판을 붙여놓고
있었던터라, 미군 정찰기들이 저공 선회를 할 적 눈에 뜨이지 않게
떼어 놓으라는 소리를 육성으로 외고 다녔다는 말입니다.
요즘에야 마을 리사무소에 마이크시스템이 갖춰져 있어 문제가 없겠으나
당시에는 마을 일을 거들어 주는 대신에 마을에서 무료 거처를 만들어 주는
일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