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생활

상사마을을 취재나온 KBC광주방송

강정순 2013. 6. 22. 07:58

 

kbc광주방송국에서 상사마을 취재를 나왔다.  

10[좋은 이웃 밝은 동네]시상에 앞서 마을 탐방을 온 것.  

정미란작가로부터 전갈이 왔다.  

- 오후 2시에 도착할 것입니다

 

 

 

 

 

편성제작국에서 온 고재범 vj

 

그 뒤를 이어 마산면장과 부면장

 

리고 구례군청 총무과에서 김종길 자치지원담당  

 

 

 

 

 

 

제빵동아리가 양파머핀과 호밀빵을 만드는 자리도

 

카메라가 놓칠리 없다. 
 

 

 

 

이들을 안내하여 간 곳이 박상철선생님댁.

 

귀촌한 지 2년차 난 이분들의 안착은

 

원주민과 귀촌자간에 이장의 역할이

 

디딤돌이 될 수도 있고 걸림돌이 될수도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상사마을은 당몰샘을 위시하여 물로 유명한 마을입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마을로 귀촌해 온 사람들이

 

95세대의 45%를 차지하고 있는 데,

 

앞으로의 천년 마을을 이 분들과 함께 펼쳐 나갈

 

[오래된 미래마을]이 바로 우리 상사마을입니다.] 

 

 

 

  

 

 

 

 

자 이쯤에서 [밝은동네]으뜸상을 받게된 귀촌자로서 한 마디. 

 

 

 

 

앞으로의 마을운영방향에 대해 다시 이장이 한 마디.

 

자주적인 마을, 주민상호간에 자조하여

 

마침내 자립마을로 우뚝설 수있도록

 

마을 공동체를 복원하는데 주력하겠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마을탐방을 모두 끝마쳤다.

 

 

 

 

구례군 상사마을, "2013 좋은이웃 밝은동네" 으뜸상 수상

 

뉴시스와이어 | 입력 2013.06.24 13:47

 

 

 

뉴시스와이어- 원주민과 귀촌인이 함께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마을

 

전국에서 장수마을로 유명한 구례군 마산면 상사마을(이장 강정순)

 

지난 21일 광주 김대중컨벤션 센터에서 개최된

 

"2013년 좋은이웃 밝은동네" 시상식에서

 

 '밝은동네' 부문 으뜸상을 수상했다.

 

이날 시상식에는 서기동 구례군수를 비롯해

 

마을 주민 등 20여 명이 참석하여 수상의 기쁨을 나눴다.

 

↑ 구례군 상사마을, “2013 좋은이웃 밝은동네” 으뜸상 수상

 

당몰샘이 있는 구례군 상사마을은 전국제일의 장수마을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그 유명세를 바탕으로 그동안 전국 각지에서 꾸준히 외지 인구가 유입되어

 

지금은 마을 전체가구의 절반을 귀농귀촌인이 차지하고 있다.

 

 

 

그동안 상사마을에서는 귀농귀촌인과 원주민들이

 

갈등 없고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에 노력해 왔다.

 

공동체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문화마을로 육성하기 위해

 

중장기 발전계획을 수립하여 마을의 발전방향을 제시하고 있으며,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여 진행하고 있다.

 

특히 2009년 전라남도 마을가꾸기 사업을 비롯해

 

행복마을, 녹색농촌 체험마을, 도농어촌체험 휴양마을 등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주민이 합심하여 우리밀 빵 만들기, 한옥 민박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체류형 방문객을 늘리고, 매출액을 늘려 주민 소득 향상에 기여하는 등

 

주변마을로부터 부러움을 사고 있다.

 

 

 

서 군수는 "2년 연속 좋은이웃 밝은동네에 선정되어 기쁘다며,

 

장수고장으로 이름난 구례는 깨끗한 자연환경과 넉넉한 인심이 있어

 

사람이 살기 좋은 여건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앞으로도 친환경을 기반으로 하는 정책추진과 행복마을,

 

훈훈한 지역만들기 시책 등을 지속 추진하여

 

민 삶의 만족도를 높여 나가겠다."라고 말했다.

 

 

 

올해 10회째를 맞이한 "좋은이웃 밝은동네"시상식은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며 살맛 나는 고장 만들기에 앞장선

 

주민과 동네를 선정시상하는 행사로

 

광주방송문화재단이 주관하고

 

전라남도와 광주광역시가 후원하고 있다.

 

 

 

 

NOTE:

 

구례상사마을은 마을카페입니다.

마을 소식을 담아내는 열린공간이 구례상사마을 카페입니다.

하여 마을의 대소사들을 가감하지 않고 실어 올린 것은

후일 축적된 자료를 통해 마을 역사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2011년부터 이장이 이 일을 이어받고 있는 데

제가 이장을 하는 동안은 꾸준히 이어갈 것 같습니다.

마치 이장이 회관 마당을 지금도 반질반질하게 쓸고 있듯

마치 지금도 마을 쓰레기 분리수거를 일일이 해내고 있듯

구례상사마을 카페에 대한 유지관리는

이장 임기를 마칠 때까지 계속이어질 것입니다.



그래봐야 두 사람이지만.

이 카페의 [우리마을]을 이름 그대로 마을분들에게만 공개합니다


 

자신의 목숨이 자기 것이 아닌 때가 있었습니다.
분단이 만들어낸 전쟁과 학살, 독재가 만들어낸 사법살인과 의문사의 고통이
아직도 선연합니다.

자신의 말이 자기 것이 아닌 때가 있었습니다.
5.16 군사쿠데타로 시작되어 유신으로 유지된 독재의 어두운 시대, 피어린
희생으로 헤쳐 왔습니다.

자신의 땀의 결실이 자신의 것이 아닌 때가 있었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지키고 민주노조 보장하라고 노동자들이 몸을 불살라 앞길을
열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 소박했습니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말, 우리의 땀의 결실을 우리 것으로 찾아오기를 원했습니다.
다시는 빼앗기거나 짓밟히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스스로를 지킬 힘을 절실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주인이 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공장과 사무실에서, 농촌과 어촌에서, 대학과 거리에서, 마을과 노점에서,

진보정치를 싹틔웠습니다.

가시밭길 진보정치에서도 가장 아픈 일은 한 때 뜻을 모았던 사람들이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2008년 종북과 패권이라 공격하며 떠난 이들이 있었지만, 민주노동당은 삶터에

뿌리내린 민중들 속에서 다시 일어섰고, 민중이 선택한 통합과 연대의 길에서

야권연대를 성사시키고 통합진보당을 만들어냈습니다.

2012년 5월, 통합진보당 비례경선 부정이라는 모함과 거짓으로 당이 보수언론과

검찰의 손아귀에 몰아넣어졌습니다.
이른바 진보언론과 진보지식인, 어제까지 연대했던 다른 야당까지도 진실을

외면하고 보수 세력과 함께 통합진보당을 짓밟았습니다.

한국현대사에 유례없는 5개월의 공격을 감행한 세력들은 진보정치의 심장이

멈췄다고 단정했을 것입니다.
종북, 패권, 부정선거 이 세 가지면 민중과 통합진보당의 혈맥은 끊긴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진보 엘리트들이 언론의 박수 속에 탈당 공세를 펴면 통합진보당은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리라 계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민중이 스스로 선택한 진보정치이기에 우리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민중이 스스로 힘을 갖는 민주주의가 아니고서는, 분단체제에서 통일을 이루지

않고서는,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자주적인 한미관계로 바꾸지 않고서는 민중이

자신의 삶을 지킬 수 없기에 우리는 이 길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진실은 밝혀졌고 누명은 벗겨졌습니다.
부정선거 논란으로 통합진보당을 파괴하려던 시도는 이미 실패했습니다.

역사는 2012년 통합진보당 사태의 교훈을 이렇게 기록할 것입니다.
“민중의 심장은 멈추지 않는다.”
“민중이 만들어낸 진보정당은 그 어떤 공격에도 죽지 않는다.”
이제, 진보정치의 심장이 다시 뜁니다.

저는 2008년 탈당 사태 직후 민주노동당에 들어왔습니다.
진보정치가 크게 상처받았을 때 노동자 농민들과 손잡았습니다.
빛나는 미래 편한 자리 찾지 않았기에 거리에서 뒹굴고 국회에서 끌려 나가도

눈물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아파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2012년 5월, 저는 근거 없이 모함당하는 사람의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진보정치의 중심 노동자 농민들을 폄하하는 말에 동조하지 않았습니다.
대가는 가혹했습니다.
21세기 한국의 진보진영에서 재현된 중세의 마녀사냥은 정확히 저를 겨냥했습니다.

단결로 통합을 완성시키지 못한 부족함에 대한 질책으로 받아들입니다.
침묵으로든 말로든, 홀로 울든 함께 웃든, 진보정치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때

까지 제게 주어진 책임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앞으로도, 사실이 아닌 것은 사실이라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보정치인으로서 제가 지켜온 원칙이고 법률가로서 가져온 윤리이며

민중들께 내보일 제 양심이기 때문입니다.

진보정치의 심장이 다시 뛰는 이 순간, 한국 정치는 이미 바뀌고 있습니다.
정치의 이름으로 여론의 몰매에 밀려 진실이 외면당하는 일은 이제 없을 것입니다.
그리해도 죽지 않는 것이 진보정치라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모함 받는 억울한 민중들은 이제 없을 것입니다.
진실만 있다면 당신을 지켜줄 진보정치가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지키는 길, 진보정치의 길에
이제 다시 나섭니다.

살고 싶습니다. 함께 살고 싶습니다.
청소년들이 성적 압박과 왕따와 학교폭력으로 죽어갑니다.
대학생들이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절망하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청년들이

반지하방에서 시들어갑니다.
밤잠 못자고 일하는 노동자들이 병들어가고, 정리 해고된 노동자는 아이들 교육비

걱정에 공사현장과 대리운전을 전전하다 돌연사합니다.
농민들은 소값 하락과 사료값 급등으로 빚더미에 오르고, 골목 슈퍼 사장님은

대형 마트 때문에 문을 닫고,
사채 빚에 시달리는 금융소외자들은 노숙자로 전락하고, 철거민들은 주검이

되어서야 망루에서 내려옵니다.
촉망받던 예술가가 굶어 죽고, 노부부가 기초생활보장급여로는 살 수 없다며

세상을 떠나는데,
아버지는 장애를 가진 아이만이라도 수급자로 만들기 위해 목숨을 끊고,
삼중 사중의 벽에 갇힌 장애인은 등급심사의 대상일 뿐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합니다.
4대강 사업으로 강이 죽어가고, 핵발전소의 공포가 주민들을 위협합니다.

군사독재를 넘어 여기까지 왔건만, 신자유주의의 파도는 노동자 민중들의 손에서

무기를 빼앗아 양극화의 절망 앞에 민중들을 내려놓았습니다.
열심히 일한 죄 밖에 없는 노동자들은 정리해고 칼바람에 내몰리고
회사 사정 어렵다고 단체행동권 포기각서를 써야하고,
농민들은 흉년에도 걱정, 풍년에도 걱정, 농산물 값 폭락 위험만 감수해야 할 뿐
한미FTA와 한중FTA로 이제 무슨 농사를 지을지 막막합니다.
중소상인 위해 대형마트 영업을 제한하려 해도, 의료비 폭등을 막으려 영리보험을

규제하려 해도 한미FTA 앞에서 정부는 손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잔인한 사회, 우리 삶을 지키기 위해, 우리 스스로 힘을 가질 것입니다.
노동자 민중의 손에 무기를 쥐게 할 것입니다.
노동자 민중의 앞에 방파제를 세울 것입니다.
이것이 진보정치입니다.

정책과 표를 거래하고자 진보정치를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진보엘리트들의 대리정치에 박수치는 것으로 진보정치를 전락시킬 수 없습니다.

노동자가 스스로 삶을 지킬 수 있도록 노동 3권을 전면 보장해야 합니다.
노동조합 만들면 비정규직 계약 해지하고 노조파괴 컨설팅 회사에 용역까지

동원해서 폭력과 기만으로 민주노조를 무너뜨리는 일 뿌리 뽑아야 합니다.

노동자라면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어떤 망설임도 없이 노동 3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노동조합 조직률 50%면 그 힘으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꿔낼 수 있습니다.
최저임금을 평균임금의 50% 이상으로 법제화할 수 있습니다.
저임금 노동자 400만 명이 가계부채의 멍에에서 풀려날 것입니다.

농민들이 쌀, 채소, 과일, 소와 같은 주요 농축산물 가격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초농산물 국가수매제로 농민을 살리고 국민의 먹거리 기본권을 보장합시다.
한미FTA 폐기하고 한중FTA 중단시키고 국가가 나서 농업을 살리고 민족의

식량을 책임집시다.

한미FTA에 올라탄 국제금융자본의 거대한 압력으로부터 중소영세자영업자의

생존을 지키고 의료 등 각종 국가정책의 공공성을 지키려면 한미FTA를 폐기

시킬 정부를 세워야 합니다.
미국의 압력으로부터 한국 국민의 삶을 지킬 정부가 필요합니다.

4대강의 보를 폭파해 강을 살리고 수명이 다한 핵발전소 가동을 즉각 중단

시키고 대체 에너지 전환에 전력을 다해 가장 빠른 때에 탈핵을 실현하고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합니다.

한반도가 심각한 전쟁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전면전 경고와 무력시위가

연일 이어지는 이 위기에서 우리의 삶을 지키는 길은, 다름 아닌 통일입니다.
청와대 주인이 바뀔 때마다, 백악관 주인이 바뀔 때마다
합의가 파기되고 우여곡절을 겪는 한반도 상황,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쳇바퀴 도는 시간 동안 커져만 가는 것은 무력 충돌의 위기이고 잊혀져 가는

것은 통일의 지향이며 굳어져 가는 것은 분단의 관성과 대결의 적대의식입니다.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연합제안과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의 공통성을 살려

통일을 이루자는 6.15 선언의 첫 번째 합의를 외면하고 경제협력만 말해서는

이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없습니다.

서로의 제도를 존중하고 분단체제를 지탱해 온 법과 제도를 철폐하자는
10.4 선언 이행의 노력은 전혀 없이장밋빛 미래만 그려서는 어떤 진전도 이룰 수

없습니다.
남북의 화해와 협력, 6.15 선언과 10.4 선언 이행은 한국 경제가 세계 경제

위기에서 벗어날 출구인 전면적 남북 경제 협력으로 나아가는 전제조건입니다.

북의 풍부한 자연자원을 비롯한 무궁무진한 성장 잠재력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민족의 혈맥을 이으면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국가보안법 철폐, 침략적 한미 합동 전쟁훈련 중단, 평화협정 체결, 한일군사

동맹 폐기, 파괴적인 종북 논쟁의 완전한 중단으로 위기 관리를 넘어 통일로

확고히 나아갑시다.
이것이 전쟁으로부터 우리의 생존을 지키고 민족 번영의 미래를 열어가는

길입니다.

진보의 길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분단체제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완전히 바꿔내려 하지

않고 통일의 지향을 확고히 하지 않으면 진보라 할 수 없습니다.

단결의 원칙을 지키지 않고 배제와 축출을 내세우며 분열의 길을 거듭하면

진보가 아닙니다.
노동자 농민의 지혜를 믿지 않고 그들의 판단을 무시하면 진보이기를 포기

한 것입니다.

우리는 민중 속에서, 민중과 함께 진보의 길을 의연히 갈 것입니다.
저는 오늘, 통합진보당의 이름으로 18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합니다.

진보의 단결과 성장을 기대하고 격려해주신 분들에게 큰 실망을 드린 부족

함을 깊이 성찰하고 겸손하고 낮은 모습으로 노동자 농어민 서민들 속에서

그 지혜를 배우겠습니다.
고단한 땀 함께 흘리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겠습니다.
민중 스스로 민중의 삶을 지키는 진보정치의 길,
함께 갈 수 있어 영광입니다. 고맙습니다.

2012년 9월 25일
통합진보당 예비후보 이정희
 
 
 
 
▲ 4·3사건은 = 제주4·3특별법은 4·3사건을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해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했다.

지난 1947년 3·1절 기념식에 참석했던 시위군중을 향해 경찰이 총을 쏴 6명의 희생자를 낸 것이 도화선이 됐다. 도민들이 발포 경관 처벌 등을 요구하며 민·관합동 총파업을 단행하자 경무부는 미군정의 묵인 아래 제주도를 '빨갱이섬'으로 규정, 파업 주동자들에 대한 검거령을 내리고 무력 진압에 나섰다. 본토에서 가세한 경찰과 우익단체들이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주민들을 연행하고 투옥, 고문을 자행해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이에 불만을 품은 좌익 무장대가 48년 4월 3일 지서와 우익단체 요인의 집 등을 습격,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와 '응원 경찰 및 서북청년단 추방' 등을 외치며 무장봉기를 일으킨 것을 시발로 섬 전체로 봉기가 확산돼 경찰 및 군과 격렬한 충돌이 발생했다.

군·경은 제주도의 해안선을 봉쇄하고 대대적인 봉기대 토벌작전을 벌였다. 한국정부 수립 등으로 한때 소강상태를 맞기도 했으나 10월부터 봉기대를 대상으로 한 초토화 작전이 시작돼 49년 3월까지 집단 학살이 곳곳에서 자행됐다.

49년 1월 17일 해안 마을인 북제주군 북촌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군인 2명이 숨지자 군인들이 '주민들이 공비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이 마을 주민 1천여명을 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시킨 뒤 이중 400여명을 총살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토벌대는 무장대와 주민들의 연계를 막기 위해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해안 마을로 강제 소개시킨 뒤 100여개 중산간 마을을 불질러 없애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군·경은 물론 그 가족들이 무장대에 의해 희생된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 사태는 49년 6월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사살되면서 사실상 거의 소멸됐으나 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4.3봉기에 연루된 수감자 대부분이 처형되고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주민들이 예비검속에 걸려 투옥되거나 학살되는 등 비극적인 역사는 계속됐다.

4.3사건은 54년 9월 21일 제주도 경찰국장이 한라산 금족령을 해제하고 지역주민들에게 부과했던 마을 성곽 보초 임무를 폐지함으로써 일단락됐다.

4·3사건 진행과정에서 발생한 인명피해에 대해선 최저 8천명에서 최고 8만여명으로 다양한 설이 제기되고 있다. 57년 4월 3일자 '제주신보'는 희생자를 무장대 7천893명, 경찰관 120명과 군인 89명 순직, 양민 1천3백여명 등 모두 9천402명이라고 밝혔다. 48년 10월 14일자 서울신문은 2만9천702명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4·3사건중앙위원회가 현재까지 신고를 받아 결정한 관련 희생자(행방불명자 포함)는 1만4천33명, 유족은 3만1천253명이다.
 
 
 
 
 
 
새마을 운동 시작한 지 10년 만에 농가부채가 26배 증가했구먼. 강제로 밀어붙여서 순박한 분들 등골만 뽑고 가난한 소작농들을 도시 빈민으로 내몰아서 저임금에 노동력 착취당하는 구조를 고착화 시켰지.

그렇게 노동력 착취해서 재벌이 되고 그 후손들만 살판났지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이 잘 살게되었다는데
지금 왜 농촌엔 젊은이들은 다 떠나고
노인들만 남아있을까???

새마을 운동으로 농촌이 잘 살게 되었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