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과 언론의 신정아 벗기기
스님과 언론의 신정아 벗기기
언론은 신씨의 사생활을 허위 학력 의혹·고위 공직자의
부도덕·청와대 자정 시스템 검증보다 중요하게 다뤘다.
주진우 기자 ace@sisain.co.kr
“도대체 왜들 이러는 거예요? 제가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건가요?”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35)는 억울하다고 했다. 하지만 당당했다. 신씨는 “매사추세츠공대(MIT) 입학처장이 28년 동안 학력을 속이다 들통났는데 뉴욕 타임스에 몇 줄 나고 끝났다고 들었다. 가짜라고 판명되면 쫓겨나는 것으로 끝인데 한국에서는 나와 아는 것만으로도 죄가 된다”라고 말했다. 신씨는 예일대 박사 학위 논문이 표절이었다는 것 이외에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이렇게 피해 다니는 내가 용서가 안 된다. 기자들이 내가 서울로 돌아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고 함부로 기사를 쓰고 있다. 서울에 가면 반드시 문제 삼겠다.”
신정아씨 파문을 정치권에서는 ‘정권 실세의 부도덕과 무너진 청와대의 자정 시스템’이라고 규정했다. 학계에서는 ‘썩어빠진 학벌 공화국에 대한 일침’이라고 했다. 하지만 신씨 파문은 본질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굴러갔다. 언론은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데 매달렸다. 검찰도 신이 나서 마구 내달렸다. 연애편지, 선물, 누드 사진…. 문화일보에 보도된 여자의 벗은 몸 사진은 이 사회 집단 관음증의 정점이었다. 연애편지 한 통만 공개된다면 관음증 종합선물세트라 부를 법하다.
사실 지금의 신씨를 만든 것도 8할이 언론의 공이었다. 1997년 말 금호미술관에 영어 통역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된 스물다섯 살 신정아. 신씨는 이듬해 금호미술관 큐레이터로 정식 채용된다. 병아리에 불과한 신씨에게 조선·중앙·동아를 비롯한 중앙 일간지들은 문화 칼럼을 내주었다. 조선일보에서 신씨는 전시를 소개하는 필진이었고, 동아일보에서는 지난 6월까지도 칼럼을 썼다. 중앙일보가 주최하는 중앙미술대전에서는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국민일보와 동아일보는 신씨가 예일 대학에서 서양미술사 박사 학위를 받는다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2000년 7월 언론에 얼굴을 처음 내민 신씨는 불과 2년 만에 미술계의 샛별이 되었다.
신씨는 기자들을 관리하는 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 현직 미술 담당기자는 물론 다른 부서 기자들에게도 신씨는 정성을 다했다. 금호미술관에 근무할 때 신씨는 지방 출신 기자들의 귀성 비행기표를 마련해주곤 했다. 이후 신씨는 명절 때마다 비행기표를 선물로 보냈다. 한 기자는 책으로 보답했다고 한다. 신씨는 “기자들에게 잘한 것은 부모님께서 베풀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추석 때마다 신씨 어머니는 고향인 경북 청송에서 사과 40상자를 기자들 몫으로 올려 보냈다. 주부 기자들에게는 참기름과 고사리 등 맞춤선물을 따로 챙겼다.
하지만 10년 동안 자신과 친하게 지내던 기자들이 최근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며 신씨는 “기자들이 악마 같다”라고 말했다. 신씨는 기자들이 치근덕대는 바람에 고생이 심했다고 했다. “기자간담회가 끝나면 남자 기자들이랑 가라오케에 가는데, 블루스를 추자고 해놓고 더듬는 기자들이 굉장히 많았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워 울고불고 했다. 나중에는 대처하는 법이 생겨 ‘내가 얼마나 비싼 몸인 줄 아느냐’며 피해갔다.”
신씨 “문화일보에 법적 대응하겠다”
신씨는 기자들과 함께 미술계 원로들을 극진히 모셨다. 원로들의 전시회나 생일 때면 꽃과 고가의 선물을 챙겼다. 특히 식사 대접을 잘했다고 한다. 신씨의 후견인 역할을 한 사람은 동국대 출신 원로 사진작가 황 아무개씨(69)다. 신씨는 “문화일보에 보도된 누드사진은 100% 합성이다. 다만 황선생님이 지난해 전시회에서 백인 여자의 몸에 내 얼굴 사진을 붙여 화를 내고 뗀 적은 있다. 문화일보에 관해서는 법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라고 말했다.
미술계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이종상 서울대 명예교수(69)도 신씨의 든든한 우군이다. 이 명예교수는 광주 비엔날레 예술감독 후보로 신씨를 추천했다. 2003년 신씨는 <월간미술>이 제정한 월간미술대상 전시기획 부문 대상을 타, 상금으로 1천만원을 받았다. 월간미술대상은 이 명예교수의 출연금을 바탕으로 운영되고 있다. 신정아씨는 “성곡미술관 이사장 김석원 회장이 구속됐을 때 미술계 인사들에게 탄원서를 받았다. 그런데 이 교수님이 지방에서 올라오자마자 사인해줘 고마움을 갖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신씨는 2002년 성곡미술관 큐레이터로 자리를 옮긴다. 언론과 원로들의 지지를 업고 있던 신씨는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58)과 가까워지면서 날개를 단다. 신씨는 “성곡미술관으로 직장을 옮기고 얼마 후 변 실장을 예일대학 동창회에서 처음 만났다. 예일대 총동창회장인 박성용 금호 회장님과 같이 만나 서너 차례 밥을 먹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검찰 관계자는 “신씨와 변 전 실장은 러브레터를 이메일로 주고받으며, 서로 그림을 그려주는 사이였다”라고 말했다. 신씨는 “인간적으로 가까운 사이였을 뿐 불륜 관계면 그렇게 오랫동안 변 실장님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림을 봐달라고 해서 본 적은 있지만 대학 졸업 후 그림을 그린 적은 한 번도 없다”라고 말했다.
변 전 실장과 교제 이후에 신씨는 자금을 모으는 데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 신씨의 전시에 가장 많은 후원금을 낸 기업은 대우건설과 산업은행. 두 기업의 수장 박세흠 전 대우건설 사장(현 주공 사장)과 김창록 산업은행 총재는 변 전 실장의 부산고 21회 동기다. 신씨가 성곡미술관에서 후원금 10억원가량을 유치한 점, 정부 부처의 미술품 구입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점 등은 변 전 실장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왕성한 활동력을 보이던 신씨는 변 전 실장을 배경으로 영역을 넓혀간다. 서른세 살 신씨는 2005년 9월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조교수로 특별 채용됐다. 동국대는 동양미술사만을 가르치는 학교다. 서양미술사를 전공한 신씨를 임용하자 반발이 컸다. 지난 9월12일 검찰은 “2005년 변 전 실장이 홍기삼 전 총장에게 예일 대학을 나온 유능한 후배라며 신정아씨를 추천했다”라고 밝혔다. 당시 동국대는 개교 1백 주년을 앞두고 발전기금을 모으는 데 관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신씨는 “서울대·중앙대·동국대 3개 학교에서 교수 제의가 있었다. 성곡미술관 학예실장 겸임을 허락해 동국대를 선택한 것이다. 동국대에 들어갈 때 영배 스님이 재단 이사장이 아니었고 인사드린 적도 없다”라고 말했다. 동국대학교 재단이사장 영배 스님은 “홍기삼 총장이 올려서 결재해준 것뿐이다. 청탁을 받은 적이 없다”라고 전했다.
불교계 갈등, 신정아 파문 촉발
2007년 2월 신씨의 학력 위조 의혹이 일었다. 하지만 지난 7월 파문을 딛고 신씨는 광주 비엔날레 예술감독으로 선정된다. 롤러코스터 상승이다. 여기서 신정아 파문은 폭발하고 만다. 변 전 실장이 서둘러 나섰지만 진화는 역부족이었다.
도화선은 동국대 전 이사 장윤 스님의 폭로였다. 배경에는 조계종 내부의 뿌리 깊은 갈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총무원을 장악한 여당과 동국대·불교방송을 장악한 야당이 치열하게 대치하고 있다. 2004년 장윤 스님은 필동 중앙대 병원 인수과정 문제를 검찰에 제기하며 동국대 재단 영배·영담 스님을 압박했다. 이를 문제삼아 동국대 이사회는 지난 5월 장윤 스님을 이사직에서 해임했다. 그러자 장윤 스님은 지난 2월부터 제기한 신씨의 가짜 학위 문제를 지속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했다. 동국대 이사진을 압박할 호재로 생각한 것이다.
처음에는 장윤 스님의 주장이 별 주목을 끌지 못했다. 배후에 변 전 실장 이름이 나돌 때도 시큰둥했다. 하지만 신씨와 변 전 실장 뒤에 몸통, 즉 유력한 대권 주자 또는 그 이상이 있다는 주장 때문에 스님의 주장은 폭발력을 갖기 시작했다. 몸통은 이해찬 전 총리와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를 의미했다. 하지만 변 전 실장의 혐의가 확실한 데다, 몸통임을 뒷받침하는 정황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아 몸통 논란은 사그라지고 있다. 신씨는 “왜 이해찬 총리와 권양숙 여사 이름이 나오는지 정말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장윤 스님은 지관 조계종 총무원장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다. 총무원장의 8대 가신으로 꼽히기도 한다. 신씨에서 촉발된 학력 위조 파문의 칼날은 불교계의 든든한 후원자인 변 전 실장을 날려버렸다. 지관 총무원장 또한 피해 가지 못했다. 당대 최고 학승(學僧)으로 동국대 총장을 역임한 지관 총무원장은 중·고등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고 해명해야 했다. 지관 총무원장은 “신정아씨 문제와 동국대 재단 문제로 학력 문제가 불거졌다. 창피스럽고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이후 지관스님은 ‘총무원장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소송을 당했다.
조계종 총무원에서 만난 한 스님은 “신정아 사태는 동국대 이사진을 공격하기 위해 능력 있는 공무원의 로맨스를 권력형 비리로 만든 사건이다. 동국대 이사 자리 몇 개를 얻으려고 장윤이 절에 불을 지른 꼴이다”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스님은 “불난 절에서 여자가 뛰어나오는 것을 기자들이 중계하면서 장사를 하고 있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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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람에게 이럴 수 있나 ”
<시사IN>은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를 뉴욕에서 단독으로 만났다.
총 세 차례, 22시간에 걸친 인터뷰였다.
신씨는 논문 표절 외에는 모든 의혹을 완강히 부인했다.
뉴욕·성우제 해외 편집위원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를 뉴욕 맨해튼에서 처음 만난 것은 지난 8월11일(토요일) 오전 11시였다. <시사저널> 문화부에서 기자로 일하던 1997년 늦가을, 금호미술관에 새로 부임한 큐레이터라고 인사를 나눈 뒤 첫 만남이었다.
신씨는 화장을 하지 않은 맨얼굴에 선글라스를 끼고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나왔다. 각종 매체를 통해 얼굴이 많이 알려진 데다, 차이나타운 식당에서 한국 사람에게 사진을 한 번 찍혔던 터라 주변을 몹시 경계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슈는 학력 위조 문제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준비해간 카메라를 꺼내지 않았고 메모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각종 의혹들에 대해 완강히 부인했다. 논문 표절 이외에는 어느 것 하나 인정하지 않았다.
이튿날, 나는 <시사IN> 기자들이 <시사저널> 시절 파업을 하면서 펴낸 단행본 <기자로 산다는 것>을 뉴욕에서 구했다. 그것을 전한다는 명목으로 같은 시간에 멕시칸 식당에서 그녀를 또 만났다. 또 5시간을 훌쩍 넘겼다.
8월 말, 이번에는 신정아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9월2일 오전 11시, 어느 건물 회의실에서 그녀를 만났다. 20일 전보다 훨씬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잠도 못 자고 식사를 제대로 못한다고 했다. 그녀는 그동안 미국 로펌과 계약을 맺었다고 했다.
정식으로 인터뷰에 들어가면서, 나는 5년 만에 전에 쓰던 아날로그 녹음기를 사용했다. 신씨는 새로 구입했다는 디지털 녹음기 버튼을 눌렀다. 공식 인터뷰는 오후 7시까지 지속되었다. 그 뒤에도 이야기는 계속되어 밤 11시에 끝이 났다. 신씨는 “내 생애 가장 오래 한 인터뷰”라고 했다. 8월의 사전 인터뷰까지 합치면 모두 22시간이 걸렸다.
9월10일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에 대한 검찰 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새로운 의혹이 불거지면서, 신씨와 하루 두세 차례 연락을 취했다. 9월12일 중앙일보에 자신의 인터뷰 기사가 실리자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평소 친분이 있는 해당 기자가 자신의 집에 울면서 전화를 했었노라고 이메일을 보내왔기에 전화를 했던 것인데, 서로 울면서 통화를 했는데 그렇게 기사가 거칠게 나왔다고 말했다. 신씨는 지난 9월13일 문화일보에 자신의 사진이 실리자 더욱 격한 감정을 토로했다.
다음은 뉴욕에서 신씨를 직접 만나 가진 인터뷰와, 그 이후 이메일과 전화를 통해 주고받은 질문 및 답변을 정리한 내용이다. 신씨는 현지 시각으로 9월13일 오전, 7월 말부터 묵고 있던 뉴욕 맨해튼 산 카를로스 호텔을 떠났다. 최근 주고받은 대화부터 정리한다(인터뷰 전문은 홈페이지(www.sisain.co.kr)에 게재될 예정이다).
누드 사진이 실렸다. 어떻게 된 건가.
작은오빠가 전화해서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어 처음 알았다. 문화일보에 관해서는 법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겠다. 누드 사진이라고는 찍은 적이 없다. 2006년 봄 갤러리인에서 사진가 황 아무개씨의 사진전이 열렸다. 갤러리에 갔더니 합성사진이 여럿 있는데, 유명 연예인의 얼굴에 피에로의 몸을 합성한 것도 있고 내 얼굴에 가슴이 엄청나게 큰 백인 여자의 몸을 합성해놓은 작품도 있었다. 이건 아니다 싶어 떼라고 했다. 그 일에 대해 아는 기자와 얘기도 주고받았다. 합성이 분명한데, 내가 죽은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지난 9월10일 검찰이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부적절한 관계’라고 밝혔다.
섹스 스캔들로 몰고 가려 하는데, 절대 아니다. 동거라니, 말도 안 된다.
이메일은 언제부터 주고받았나?
알게 된 것은 성곡미술관으로 옮긴 직후인 것 같은데 (신씨는 2002년 4월 성곡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알고 지낸 지 몇 년이나 되었는데 그 정도 이메일을 썼다고 하면 많은 것은 아니지 않나.
이메일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었나?
전시 이야기, 안부 인사. 진짜 연인 사이라면 이메일 주고받지도 않았을 거다. 더 조심하겠지.
변 실장과 연인 사이라는 유력한 증거가 나왔다고 한다. 서로 그림을 그려주었다는데.
대학 졸업 후 단 한번도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변 실장님이 본인이 직접 그린 그림을 봐달라고 해서 봐준 적은 있다. 그것도 나를 그린 것은 아니다.
목걸이를 선물로 받았다는데.
그림을 선물로 드린 적이 있다. 그림 값을 돈으로 주겠다고 해서 극구 사양했다. 그랬더니 돈 대신 목걸이를 준 것이다.
청와대에 들어간 사실은 있나.
두 번 들어갔다. 문화 쪽을 담당한 여성 비서관이 구경을 시켜주신 적이 있고, 변 실장님 방에 그림을 디스플레이해준 적이 있다. 비서관이 부탁을 해서 전문업체 동부아트 직원 두 사람과 일요일에 가서 그림을 걸었다. 그때 실장님은 안 계셨다.
가택 수색에서 ‘물증’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함께 찍은 사진 같은 것은 없다. 증명사진은 한두 장 있을 거다. 명함에 사진 넣는 게 유행할 때 명함 디자인 해보라고 해서 갖고 있었다.
왜 지난번 인터뷰(9월2일)에서는 그와 알고 지냈다고 얘기 안 했는지.
누구를 알고 지낸 것 자체만을 두고도 외압이 있다고 하지 않나. 돌아가는 상황이 그렇다 보니, 누구를 안다고 말을 못 한다. 지금도 한 사람의 인생이 망가지지 않았나.
(이하 9월2일 인터뷰)
뉴욕에 온 지 2개월 가까이 되어간다. 한국에서 수습하지 왜 이곳에 와 있는가.
내 입장에서는 학력 문제가 뭐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 팩스도 내가 조작했다고 하고, 내가 말하는 모든 걸 거짓말이라고 하지 않나. 도망을 온 게 아니라 확인 작업을 하러 뉴욕에 온 거다.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 입학 혹은 중퇴 논란이 있었다. 합격이나 입학을 한 것인가.
서울대에 다녔다고 이야기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서울대 시험도 본 적이 없다. 서울대 미대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께서 크게 반대하셔서 대신 유학을 간 거다.
캔자스 대학도 3년 중퇴다, 대학원도 안 다녔고, MBA도 안 했다고 확인했다는데.
캔자스 대학은 1992년에 입학해서 1996년 5월에 졸업했다. 1994년 9월 학기에 MBA를 시작해 학부와 MBA를 4년6개월 만에 끝냈다. 변호사들이 확인 작업을 하고 있으니까 서울에 가서 공식적으로 밝히겠다.
예일 대학 박사 논문이 표절된 걸로 판명났다.
2001년부터 2002년까지 2년(4학기) 코스워크 하고, 2003년 봄에 종합시험 보고, 2004년 가을에 (논문) 디펜스를 하고, 2005년 5월에 졸업했다. 물론 정규 과정으로 된 건 아니지만 이렇게 공부를 해서 분명히 마쳤다. 이런 과정을 밟으면서 내 공부를 도와주는 가정교사 같은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 도움을 받으면서 뭐가 잘못되었는지, 난 아직 잘 모르겠다. 잘못되었다는 걸 지난 6월6일에 처음 알았다.
박사과정 하면서 남의 도움을 받았다는 건가.
그런 거는 변호사 통해서 자세히 밝히겠다.
그 가정교사가 논문을 썼다고 할 수 있나.
처음부터 그 여자가 쓴 건 아니다. 내가 큰 테두리는 잡아줬고, 중간중간에 내용 안 맞는 것 때문에 마찰은 많았지만 (그녀가) 100% 다 쓴 건 아니다. 정리하는 과정에서 내버려둬서 그렇게 되었다.
예일 대학에서도 졸업생이 아니라고 하는데.
예일 대학 박사과정에 분명히 입학을 했고, 등록금을 냈고, 수업도 인터넷 통해 받으면서 리포트로 대체했다. 티칭(Teaching)과 큐레이터십은 면제받고, 영어로 강의할 능력이 된다고 인정받았다. 현직 큐레이터이니까.
등록금이 얼마였는지 기억나나.
한 학기에 1만2천~1만3천 달러 했던 것 같다.
본인이 송금했나.
돈은 내가 직접 내지 않았고, 이것도 나중에 얘기하면 좋겠다.
등록금이 예일 대학 은행 계좌로 들어갔나.
이 부분도 나중에 밝히겠다.
그럼 지금 인터뷰에서 확인해줄 수 있는 것은.
예일 대학 박사과정에 입학해서 학교 다니고 졸업했다는 것. 졸업 가운도 가지고 있다.
졸업 가운? 졸업식에 갔었나.
졸업식에 참석하려고 뉴욕에 가기는 했다. 가운을 한 달 전쯤에 맞춰야 하는데 그걸 하지 않은 거다. 빌리는 것도 3주일 전에 예약해야 하는데, 그것도 못해서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나중에 주문해서 졸업 가운을 받았다. 앞으로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동국대에서 확인 팩스를 보낼 당시 외국에 나가 있었다면서, 그것 때문에 당신에게도 혐의를 두고 있던데.
동국대에 임용된 지 이틀 만에 사표를 냈다. 사표를 쓰고 외국에 나온 사람이 어떻게 동국대에서 팩스를 보냈는지, 안 보냈는지 알겠나.
성곡미술관에서는 어떤 전시를 주로 했나. 미술계의 어떤 사람들은 해외에서 만들어진 전시를 돈 주고 사왔다고 하는데.
해외 전시는 다 만들어진 것을 사온 적이 없다. 2~3년씩 공을 들여서 가져온 거다. 전시 대여비 한번 내본 적 없다.
기업으로부터 협찬은 어떻게 받았나.
<뉴욕의 다국적 디자이너 전>을 할 때 처음 받았는데, 그것을 하려면 오랫동안 공을 들여야 한다. 기업의 담당 실무자들에게 미술관 초대권을 줘서 가족과 함께 오게 하고, 회사 복도에 걸려 있는 작품도 바꾸어주고, 달력 자문도 해주고, 달력에 들어갈 작가 작품도 싸게 섭외해주고, 텔레비전 광고 만드는 데도 도움을 주고…. 한번 접촉을 하면, 끊지 않고 지속해서 관계를 유지한다. 실질적으로 이렇게 하는 데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연이은 미팅 때문에 화장실 가고 싶은데도 참아야 했던 적이 많다.
동국대에서 교수직 제안받은 게 언제인가. 어떤 과정을 통해 받았나.
2005년 5월 (예일 대학) 졸업하고 나서. 전임 제안을 해온 곳이 서울대, 중앙대, 동국대다.
서울대에서? 전임 자리를?
서울대, 중앙대, 동국대에서 각각 연락이 왔는데, 중앙대에서는 교무처에서 교수 채용이 있다고 전화만 두 번인가 왔었고 서울대는 당시 정운찬 총장께서 연락을 해서 뵙게 되었다. 그때 삼성에서 펀딩받아서 서울대미술관 개관을 앞두고 있었다. 관장 추천을 받는 중이었는데 내가 그 한 사람이었나 보다. 교수를 겸하는 자리다. 미국 유명 대학들처럼 서울대미술관을 제대로 만들고 싶다고 하셨다. 그와 관련해 그분을 몇 번 뵈었다. 그런데 성곡을 갑자기 그만두고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고, 서울대는 국립이지 않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일하는 것 보니까 나올 때 외출증도 써야 하고 보통 복잡한 게 아니더라. 나는 그렇게는 일을 못하는 스타일이다. 서울대는 접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어서, 정운찬 총장님께 정형민 교수를 추천해드렸다. 그후 동국대에서 연락이 왔다. 성곡미술관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8월 초에 캔자스 주립대, 예일 대학의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를 다 제출했다. 성적증명서 원본 하고 학위증 원본 다 갖고 오라고 했다. 8월31일 원본 자료를 다 들고 인사과에 갖다 줬다. 성적증명서는 그때 처음 받았으니까 복사할 새도 없었다. 받자마자 우표 붙은 채로 그대로 갖다 줬다.
학위증은 졸업장을 말하는 건가. 액자에 든 거?
맞다. 액자에서 빼서 갖다 줬다.
캔자스 대학의 학부와 석사, 예일 대학 박사, 성적증명서와 학위증을 동국대 인사과에 모두 갖다 줬다고?
그렇다. 정우택·오원배 선생 뵙고 나서, 이게 아니다 싶어서 9월2일 사표를 냈다. 임용된 지 이틀 만에 사표를 냈으니 얼마나 서글펐겠나. 그로부터 며칠 있다가 외국에 나와버렸다. 외국에 나왔더니 인사과에서 이메일을 보냈더라. 학교에서는 휴직 처리하라고 하니, 서류를 작성해 보내라고 했다.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분명히 전했다. 이때쯤에 학교에 교양과목을 전담하는 교양교육원이 생겼다. 국문학과 황종연 교수가 원장을 맡게 되면서 한두 번 전화했다. 교양교육원에서 교양과목을 전담해보라고 연락을 했다. 가을쯤에 안 한다고 거절을 했는데, 12월에 성곡미술관으로 찾아왔다. 미술사 하고 시각예술과 시각문화 같은 미술 과목을 해보라고 해서, 3월에 교양교육원 조교수로 복직했다. 그 이후 2006~2007년 강의 열심히 했고, 강의가 학생들에게 인기도 있었다.
장윤 스님이 이사회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처음 문제 제기한 것은 2007년 2월이다. 들어갈 때는 아무 문제 없었다.
동국대에서는 받은 서류가 어디 있다고 하나.
분실했다고 한다. 나한테 분실했다고 얘기했다. 2007년 2월 내가 미국에 있을 때인데 황종연 선생님이 전화를 했다. 서울 가서 만났더니 2월 이사회에서 장윤 스님이 이사회에서 신정아가 가짜 박사라고 얘기해서, 학교가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황종연 선생님이 논문하고 학교 졸업한 증명서 복사본이라도 볼 수 있느냐고 해서, 보여드렸다. 그랬더니 ‘아무 문제 없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5월29일 장윤 스님이 학교 이사회에서 해임을 당했는데, 해임당하신 건 내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고 들었다. 내 문제는 명예훼손으로 조금 포함되어 있었고, 당시 학교 고발 문제 같은 게 있었나 보더라. 6월6일 오원배 선생이 나의 논문 표절 문제를 학교에 제보한 거였다. 언론에 도는 서류가 바로 이거다. 나는 어쨌든 선생 입장에서 도덕적으로 책임이 있다. 6월20일 성적 다 내고 25일 뉴욕에 나오면서 사표를 제출했다. 그게 다다.
성 스캔들 문제가 불거졌는데.
한국에서는 독신 여성으로 살아가기가 정말 어렵다. 언론에서 배후가 권력 쪽에 있다고 하는데 10년 동안 일을 열심히 하면 이 분야에서 당연히 전문가가 될 수밖에 없다. 그 배후에 누가 있다고 하는 것은 싱글이고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라서 그런 거다. 내가 남자였으면 이러지 않을 거다.
호화로운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돈이 어디서 났나.
집에서 나왔다. 어머니가 주신다. 평생 먹고 살 만큼 유산도 받았고.
한국에서는 개인회생을 신청한 신용불량자라고 확인되었다던데.
한국 신문에 기사 난 것 보고 알았다.
신용카드 몇 개나 가지고 있나.
한국 거 2개(신씨는 카드 4장을 지갑에서 꺼냈는데, 그중 하나는 미국에서 발급받은 신용카드, 또 하나는 국내의 직불카드, 나머지 2개는 한국에서 발급받은 신용카드였다. ‘제일은행 First Check 4481 2349 9574 **** VISA 06/10 Jeong Ah Shin’ ‘하나은행 4400 2540 0672 **** VISA Jeong Ah Shin’).
쓰는 데 문제가 없었나.
그렇다.
신용불량자가 이럴 수가 없는데.
기사 보고 깜짝 놀라서 어머니께 여쭤봤더니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후 친척들이 보증을 많이 서달라고 했다고 한다. 보증 선 친척이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내 앞으로 빚이 엄청 생긴 거다. 그분 입장에서는 책임은 져야 하고 갚을 수 있는 능력은 한정적이고, 그래서 내 이름으로 개인회생 신청을 했다고 한다.
개인회생 신청을 남이 할 수 있나?
대리인으로 했는지 나는 잘 모른다. 나중에 집에서 그 사실을 알고 너무 황당해했다. 이렇게 신청을 하면 공식적으로 신용불량자가 되는 거니까.
광주 비엔날레 총감독으로 어떻게 선정되었나.
논문 표절 문제가 불거져서 6월25일 학교에 사표를 내고 뉴욕에 오지 않았나. 6월26일 광주 비엔날레 실무자가 뉴욕으로 연락을 해왔다. 총감독 선정을 원점에 돌아가 선정하기로 했는데, 나만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고. 당시 광주 비엔날레는 일정이 굉장히 촉박했다. 내가 유럽을 가야 해서 7월6일이나 7일에 들어가서 하겠다고 했더니 4일 이사회 이전에 하든가, 아니면 못한다고 하는 거다. 그래서 안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종상 선생님이 인터뷰를 하라고 권유하셨다. 그래서 다음 날 바로 비행기 타고 들어갔다. 7월1일 일요일 아침 10시에 인터뷰를 했다. 그 다음날 오후에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만장일치로 통과된 거다. 한 사람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비엔날레에서 전화 왔을 때 동국대 사표 냈다, 이런 얘기는 안 했나.
그 얘기는 안 했다. 사표는 냈지만 당시에 수리가 안 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리고 6월25일에 사표 냈고, 26일에 전화받은 거다. 어차피 다음에 얘기해도 될 문제였으니까.
학교에서 문제가 생겨 사표를 냈다고 하면 광주 비엔날레에서 총감독으로 내정했을까.
이런 문제로 학교에 사표는 냈지만 광주 비엔날레 총감독하고 학교 교수하고는 상관없는 거다. 광주 비엔날레 총감독은 대학교수만 하는 거 아니지 않나. 전시기획자가 하는 거지.
지금까지 정식 인터뷰를 하지 않은 이유는.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러 뉴욕에 왔고 그것을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또 거짓말한다고 할 테니 인터뷰하지 않은 거다. 지금 인터뷰를 하게 된 것은 내 가족이 너무 힘들어서다. 심지어 조카는 고모가 가짜 박사라고 아이들에게 맞고 들어왔다고 하더라. 9월 말이나 10월 초쯤이면 마무리되지 않을까 싶은데 마무리되면 바로 서울에 들어갈 거다. 검찰에 가서 조사받을 거다.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벌을 받을 거다. 내가 더 이상 잃을 게 뭐가 있겠나. 이미 끝난 사람인데.
만일 본인이 원하는 대로 결과가 안 나오면 어떻게 할 건가.
그대로 결과를 들고 들어갈 거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간에,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러 왔고, 변호사들을 통해서 확인된 결과를 가지고 들어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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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대 ‘가짜 팩스’ 국제적 미스터리
신씨의 학위 취득을 뒷받침하는 물증이었던 팩스의 정체가 안개 속이다.
누드 사진을 놓고도 주장이 엇갈린다.
노순동 기자 lazysoon@sisain.co.kr
관가와 종교계로 논란이 번지고 있는 가운데, 핵심적인 의문점에 대한 관심이 잊혀가고 있다. 이른바 ‘가짜 팩스’의 정체이다.
이미 예일 대학이 신정아씨의 학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인한 만큼, 학위 논란은 공식적인 차원에서는 사실상 끝난 상태이다. 그러나 지난 2년 동안 신씨의 학위 취득을 뒷받침하는 확실한 물증 노릇을 해온, 예일 대학으로부터 날아든 가짜 팩스가 어떤 경로로 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속 시원히 밝혀진 바가 없다.
문제의 팩스는, 지난 2005년 9월 동국대가 예일 대학에 우편으로 확인 요청 공문을 보낸 뒤 10여 일 만에 도착했다. 당시 신씨가 미국에 있었다는 정황으로 미루어 신씨가 보냈을 수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본인은 완강히 부인했다(57~61쪽 인터뷰 참조). 최근까지 동국대가 과연 우편을 발송했는지 여부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9월 초 비로소 검찰의 조회를 통해 동국대가 발송한 공문이 예일 대학측에 접수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진전은 여기까지이다. 검찰이 확인했다는 예일 대학측 접수처와 접수자 신원에 대해서 예일 대학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동국대는 검찰이 확보한 우편 수령 내역서를 다시 보내고 조회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다.
학위 브로커 개입되었을 가능성 있어
팩스가 온 경위가 중요한 까닭은, 동국대가 예일 대학에 우편 조회를 했다는 것을 파악해야 팩스를 보낸 쪽에서 대처가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동국대 내부에서 협조하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 초기부터 나돈 이유이다.
실무를 맡았던 안 아무개 교수는 총장에게 학력 조회 과정을 직보했다고 밝혔다. 당시 부서 책임자는 궐석 상태였다. 그는 또한 팩스가 도착하자마자 그것을 총장에게 전달했다. 안 교수는 팩스를 전달한 이튿날 보직을 사임했다.
2005년 당시 검증이 더 세밀하게 진행되지 못한 이유는 또 있다. 신씨가 9월1일 임용된 후 이틀 만에 동국대에 사표를 내고 나온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신씨를 교원으로 두려는 홍 총장의 노력은 이례적일 정도였다. 사표를 수리하지 않은 채 신씨의 학력을 조회하라고 지시했다. 또 예일 대학으로부터 팩스가 온 뒤에는 휴직으로 처리하도록 했다. 신씨가 다시 동국대에 복귀한 것은, 홍 총장의 거듭된 노력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홍 총장은 신설된 교양교육원으로 뒤늦게 신씨를 소속 전환시켰다. 당시 교양교육원장이었던 황종연 교수는 최근 “홍 총장이 신씨를 계속 교원으로 쓰고 싶다며 받아줄 수 있느냐고 요청했고, 교양 과목을 강의하는 데 무리가 없다고 판단해 신씨를 접촉했다”라고 경위를 밝혔다. 그것이 2005년 12월이다. 당시 신씨는, 9월에 제출한 사표가 수리되지 않은 상태. 뒤늦게 휴직원을 소급해 제출했고, 이어 복직원을 내는 방식으로 임용 상태를 유지시켰다.
황 교수는 올해 초 교양교육원장 퇴임을 앞두고 이 문제를 아퀴짓기 위해 다시 신씨를 불렀다고 했다. 그는 신씨에게 “성적증명서를 제출해라. 그게 시간이 걸리면 당장 할 수 있는 것으로 지도교수의 서신이라도 제출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신씨는 지도교수 서신 제출에 대해 “체면이 깎이는 일”이라며 이행을 거부했다고 한다. 대신 졸업 논문 사본과 학위기 사본을 들고 왔다.
이번 인터뷰에서 신씨는 “임용 당시 2005년 가을 이미 동국대에 우표가 붙은 봉투로 성적증명서 원본을 제출했다. 동국대에서 모두 잃어버린 것이다. 나는 다 내고 당당히 들어갔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황 교수는 그 가능성을 일축했다. 신씨가 자신에게 ‘사본으로 충분하지 않느냐’라고 했을 뿐, ‘이미 원본을 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국대 인사 실무자도 “대응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라고 잘라 말했다.
신씨 “누드는 사진작가의 합성 사진”
게다가 신씨는 이번 인터뷰에서 황 교수가 올해 초 ‘서류를 보니 아무 문제 없는데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다’라고 답했다고 말했다. 황 교수는 이에 대해서도 부인했다.
사안을 밀착해서 들여다본 동국대 관계자들은 이번 사안이 ‘학위 브로커’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상일 전 학사관리본부장은 “신씨가 알고 찾아갔든, 일정 부분 속았든 간에 학위 취득 과정에서 예일 대학 주변의 브로커에게 의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동국대 교수들은 재단의 해묵은 갈등과 계파 싸움이 원활한 의사 소통을 막았고, 결국은 게이트로 비화되도록 단초를 제공한 것이 아니냐며 개탄하고 있다. 이상일 전 학사관리본부장은 “지난 2월에 장윤 스님이 이사회에서 문제를 제기했다고 하지만, 실무진들은 이를 파악하지 못했다. 이사회나 다른 경로로 재차 확인을 요청했다면 일이 이렇게 번지도록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아쉬워했다. 의혹 제기만 무성했을 뿐, 조사에 착수할 만한 지시나 물증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기삼 총장까지 문제의 심각성을 몰랐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