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생활
리영희,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강정순
2010. 12. 5. 18:37
6.25사변이 일어난 1950년, 이승만 정권이 현재의 예비군 격으로 창설한 국민방위군이 전선 이남 교육대로 이동하게된다. 그 과정에서 68만여명 중 수천에서 최대 수만명이 추위와 배고픔, 질병 등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는 데 소위 국민방위군 사건이 그것이다. 당시 군당국은 국민방위군 68만350명 중 사망확인자는 1234명이라고 밝혔지만최종 목적지인 교육대에 도착한 인원은 29만8124명뿐이었다. 엄동설한에 입을 것도, 먹을 것도 주지 않고 무조건 목적지까지 이동하라는 지시는 일종의 대량 학살사건과 다르지 않다 동원된 장정들은 군번이나 총기는 물론 피복과 식품도 지급받지 못한 채 ‘죽음의 행군’에 나서야 했고 수뇌부를 포함한 간부들은 이들에게 할당된 예산을 유용, 양곡과 피복 등을 빼돌렸다.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비난 여론이 들끓자 이승만정권은 1951년 4월 국민방위군을 서둘러 해산했고 국민방위군 사령관 등 4명을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착복한 혐의로 총살, 사건을 조기 매듭지었다. 당시 통역장교로 현장을 목격한 리영희가 있었다. 그는 이 사건을 두고 “6·25전쟁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 말살행위였다”며 “이승만정권과 지배적 인간들, 그 체제 이념의 적나라한 증거였다”고 회고하였다. 육군소령으로 예편한 그가 외신부기자로 일하면서 얻은 다방면의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펴낸 저작들은 한국 진보세력의 보편적 세계관 형성에 기여했다는 평가인 데 그런 그가 오늘 8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펴낸 책중에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두레,1994) 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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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 강정순 2010.12.05 22:19
평안북도 삭주출신으로, 한국해양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6.25 사변이 일어나자 국군에 입대하여 장교생활을 지낸다.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 발생 당시 국군 통역장교로 지내면서 이 사건을 직접 접하고 목격했다고 한다. 리영희에 따르면, 미군 고문단 장교와 함께 무리하게 보급품을 빼서 그들을 도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 뒤에 리영희는 제1공화국 정부 체제에 대해서 강한 혐오감을 느꼈다고 회고했다.[1] 6.25 사변 이후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1957년 합동통신을 시작으로 외신부 기자생활을 시작하여 1965년에는 조선일보에서 일했고, 1972년부터는 한양대학교의 교수로 부임하였다. 일찍이 민주화를 위한 언론활동을 하여 1961년부터 5.16 군사혁명에 반대하는 글을 외지《New Republic》에 기고하였다. 1964년 유엔의 남북한 동시 초청을 기사화하여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풀려났다. 박정희정권 시절 해직과 복직을 반복하였고, 1977년에는 저서 《8억인과의 대화》가 중국공산당을 미화했다는 이유로 반공법위반으로 복역하기도 하였다.
1987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서 교환교수로 한국사를 강의하였다. 이후 한겨레신문의 이사 및 논설위원으로 일했다. 1989년에는 한겨레신문의 방북취재를 기획했다는 이유로 다시 국가보안법에 의해 복역하였으나, 특사로 사면복권에 되어 석방되었다. 이후 뇌졸증으로 쓰러져 투병하다 회복하였고 이후 건강상 저술활동은 자제하면서도 지속적인 사회참여와 진보적 발언을 해오고 있다.
외신부기자로 일하면서 얻은 다방면의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많은 저작을 펴내, 한국 진보세력의 보편적 세계관 형성에 기여했다.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창비사,1974년
《우상과 이성》한길사,1977
《8억인과의 대화》창비사,1977
《베트남 전쟁》두레,1985
《역정》창비사 1988
《자유인,자유인》범우사,1990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두레,1994
《스핑크스의 코》까치,1998
《동굴속의 독백》나남,1999
《반세기의 신화》삼인,1999
1987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서 교환교수로 한국사를 강의하였다. 이후 한겨레신문의 이사 및 논설위원으로 일했다. 1989년에는 한겨레신문의 방북취재를 기획했다는 이유로 다시 국가보안법에 의해 복역하였으나, 특사로 사면복권에 되어 석방되었다. 이후 뇌졸증으로 쓰러져 투병하다 회복하였고 이후 건강상 저술활동은 자제하면서도 지속적인 사회참여와 진보적 발언을 해오고 있다.
외신부기자로 일하면서 얻은 다방면의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많은 저작을 펴내, 한국 진보세력의 보편적 세계관 형성에 기여했다.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창비사,1974년
《우상과 이성》한길사,1977
《8억인과의 대화》창비사,1977
《베트남 전쟁》두레,1985
《역정》창비사 1988
《자유인,자유인》범우사,1990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두레,1994
《스핑크스의 코》까치,1998
《동굴속의 독백》나남,1999
《반세기의 신화》삼인,1999
- 강정순 2010.12.05 22:20
2005년에 출간된 < 대화 > 에서 리영희는 자신이 1990년대 초 서울대 신문연구소와 < 문화방송 > 이 공동 주최한 학술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동북아 지역의 평화적 질서 구축을 위한 제언'을 언급하면서 남북문제, 나아가 통일문제 해법은 여전히 그 길밖에 없다고 말했다. "북한의 핵이나 남한의 핵이나 한반도의 비핵화, 가능하면 궁극적으로 통일 한국의 비핵화·중립화로 동북아시아 6개국의 공동체적 평화체제를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서 그는 남북이 각각 자체 수정을 거쳐 서로를 닮아가는 '체제수렴적 통일'론을 주창했다. "남북한이 시장경제와 사회주의를 절반씩 도입해서 비슷한 경제·문화가 되어야 각기 국민의 행복이 증진될 수 있어요. 그렇게 서로 상대방의 장점을 절반씩 가미한 제도의 국가는 통합되기가 쉽지." 2004년 대담에서도 그는 "현재의 이질적인 두 체제를 재통합하기 위해서는 체제수렴적인 방식밖에 없다"고 했고, 이미 1988년 8월 잡지 < 말 > 과의 인터뷰에서도 그런 발상의 윤곽을 피력했다.
"남북이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일정기간 연합의 형식으로 두면서, 두 지방국가의 대표기구가 쌍방의 두 지방국가 내부의 경제구조라든가 이질적인 요소를 순차적·단계적으로 수정 변화시켜나가는 형식을 고려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느슨한 국가연합, 낮은 단계의 연방' 방식의 통일방안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고, 1989년 4월 문익환 목사가 평양에서 김일성 북한 주석과 합의한 통일방안과도 그리 다르지 않다. 그래야 남북이 서로 접근할 수 있는데, "현재의 체제로는 대립과 충돌, 심지어 전쟁을 피할 수 없어요." 이번 연평도 사태로 그의 우려는 이미 현실화했다.
이는 그의 사회민주주의 소신과도 밀접하게 얽혀 있다. "나의 결론은 인간은 물질적 요소로 존재하는 동물이니까 자본주의적 요소로 말미암은 필연적인 비인간화 결과를 5할 정도의 선에서 인정하고,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인간성 파괴의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 게마인샤프트(공동체)적·사회주의적 요소를 5할 정도 융합하는 방식인 사회민주주의적 체제가 인류 사회의 지금 발전단계에서는 가장 낫고, 사회주의 없는 미국식 체제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해요."
그러나 리영희는 그런 체제로 나아가는 데는 두 가지 중대한 장애가 가로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하나는 우리 내부의 기득권 세력, 그리고 또 하나는 그들이 기대고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다. "우리 경제는 미국 자본주의 경제 구조 속에 강력히 편입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때문에 극단적으로 불평등한 경제구조를 평등하게 만들려고 시도할 때, 기득권세력이 야기하는 내적인 요소와의 투쟁뿐만 아니라 주로 미국을 축으로 한 큰 구조와의 투쟁도 동시에 수행해야 합니다."
리영희는 분단을 주도한 미국의 남한 지배가 한반도 문제의 출발점이자 본질이며, 그 미국과의 모순관계 해소 없이는 한반도 안보위기 해소는 물론이고 남북문제, 통일문제도 해소할 길이 없다고 보았다. 북핵문제도 거기에서 시작됐으며,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남한과 미국이 막대한 군사비 투입을 중단해야 하고 북한을 우선적인 공격대상으로 겨냥한 미국 군부의 전략이 철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과의 지난 8월27일 병상 인터뷰에서도 리영희는 "서해와 남해에 미국 항공모함이 그렇게 마음대로 오가는" 상황이 중국을 자극하면서 위기를 심화시킬 것이라며 지금을 "(을사)조약 시기, 강제병탄 직전인 1905년, 거의 사실상 국가를 상실한 그 시기로 본다"고 말했다. 다만 강제병탄 주체가 일제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2006년 인터뷰 때는 이런 말도 했다. "100년 전과도 비슷하고 주변 열강들에게 우리가 농락당한 1920년대 이후 상황과 더욱 비슷하다. 1920~30년대는 바로 제국주의 각축전이 치열하게 전개된 시대다. 다만 상당히 다른 점은 러시아·중국 쪽이 위기상황을 조성할 동기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해로우니까. 건설과 평화 쪽이 그들에겐 유리하다. 문제는 역시 지금도 백년 전과 마찬가지 입장을 추구하고 있는 미국과 일본·영국이다. 이들 남북분단 고착화를 노리는 외부세력 때문에 우리의 내부 갈등 구조가 지속되고 있다."
남북문제, 한반도 통일문제의 해결은 결국 그런 안팎의 모순을 해소하는 것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으며, 그 해소의 주체는 각성한 시민 또는 민중일 수밖에 없다고 생전의 리영희는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남북이 각각 자체 수정을 거쳐 서로를 닮아가는 '체제수렴적 통일'론을 주창했다. "남북한이 시장경제와 사회주의를 절반씩 도입해서 비슷한 경제·문화가 되어야 각기 국민의 행복이 증진될 수 있어요. 그렇게 서로 상대방의 장점을 절반씩 가미한 제도의 국가는 통합되기가 쉽지." 2004년 대담에서도 그는 "현재의 이질적인 두 체제를 재통합하기 위해서는 체제수렴적인 방식밖에 없다"고 했고, 이미 1988년 8월 잡지 < 말 > 과의 인터뷰에서도 그런 발상의 윤곽을 피력했다.
"남북이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일정기간 연합의 형식으로 두면서, 두 지방국가의 대표기구가 쌍방의 두 지방국가 내부의 경제구조라든가 이질적인 요소를 순차적·단계적으로 수정 변화시켜나가는 형식을 고려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느슨한 국가연합, 낮은 단계의 연방' 방식의 통일방안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고, 1989년 4월 문익환 목사가 평양에서 김일성 북한 주석과 합의한 통일방안과도 그리 다르지 않다. 그래야 남북이 서로 접근할 수 있는데, "현재의 체제로는 대립과 충돌, 심지어 전쟁을 피할 수 없어요." 이번 연평도 사태로 그의 우려는 이미 현실화했다.
이는 그의 사회민주주의 소신과도 밀접하게 얽혀 있다. "나의 결론은 인간은 물질적 요소로 존재하는 동물이니까 자본주의적 요소로 말미암은 필연적인 비인간화 결과를 5할 정도의 선에서 인정하고,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인간성 파괴의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 게마인샤프트(공동체)적·사회주의적 요소를 5할 정도 융합하는 방식인 사회민주주의적 체제가 인류 사회의 지금 발전단계에서는 가장 낫고, 사회주의 없는 미국식 체제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해요."
그러나 리영희는 그런 체제로 나아가는 데는 두 가지 중대한 장애가 가로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하나는 우리 내부의 기득권 세력, 그리고 또 하나는 그들이 기대고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다. "우리 경제는 미국 자본주의 경제 구조 속에 강력히 편입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때문에 극단적으로 불평등한 경제구조를 평등하게 만들려고 시도할 때, 기득권세력이 야기하는 내적인 요소와의 투쟁뿐만 아니라 주로 미국을 축으로 한 큰 구조와의 투쟁도 동시에 수행해야 합니다."
리영희는 분단을 주도한 미국의 남한 지배가 한반도 문제의 출발점이자 본질이며, 그 미국과의 모순관계 해소 없이는 한반도 안보위기 해소는 물론이고 남북문제, 통일문제도 해소할 길이 없다고 보았다. 북핵문제도 거기에서 시작됐으며,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남한과 미국이 막대한 군사비 투입을 중단해야 하고 북한을 우선적인 공격대상으로 겨냥한 미국 군부의 전략이 철회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과의 지난 8월27일 병상 인터뷰에서도 리영희는 "서해와 남해에 미국 항공모함이 그렇게 마음대로 오가는" 상황이 중국을 자극하면서 위기를 심화시킬 것이라며 지금을 "(을사)조약 시기, 강제병탄 직전인 1905년, 거의 사실상 국가를 상실한 그 시기로 본다"고 말했다. 다만 강제병탄 주체가 일제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2006년 인터뷰 때는 이런 말도 했다. "100년 전과도 비슷하고 주변 열강들에게 우리가 농락당한 1920년대 이후 상황과 더욱 비슷하다. 1920~30년대는 바로 제국주의 각축전이 치열하게 전개된 시대다. 다만 상당히 다른 점은 러시아·중국 쪽이 위기상황을 조성할 동기가 없다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해로우니까. 건설과 평화 쪽이 그들에겐 유리하다. 문제는 역시 지금도 백년 전과 마찬가지 입장을 추구하고 있는 미국과 일본·영국이다. 이들 남북분단 고착화를 노리는 외부세력 때문에 우리의 내부 갈등 구조가 지속되고 있다."
남북문제, 한반도 통일문제의 해결은 결국 그런 안팎의 모순을 해소하는 것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으며, 그 해소의 주체는 각성한 시민 또는 민중일 수밖에 없다고 생전의 리영희는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한겨레 | 입력 2010.12.05 20:10
- 강정순 2010.12.05 22:20
5일 타계한 고(故) 리영희 한양대 교수의 장례가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진다.
이날 구성된 장례위원회 측은 장례위원장을 결정하고 장례를 민주사회장으로 4일간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공식 명칭은 '리영희 선생 민주사회장'이다.
장례위원장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고은 시인, 임재경 초대 한겨레신문 부사장이 공동으로 맡기로 했다.
장례위 고문에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이름을 올렸다. 정치계에서는 민주당 손학규 대표와 민주노동당·진보신당·국민참여당·창조한국당 등 야5당 대표들이, 재야계에서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등이 포함됐다.
종교계에서는 명진 스님과 송기인 신부 등이 고문으로 위촉됐다. 예술·문학계 인사들로는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시인 신경림씨, 문학평론가 김병익씨 등이, 법조계에서는 한승헌 변호사 등이 고인의 가는길을 배웅한다.
한편 빈소는 서울 신촌 연세 세브란스 병원 특1호실에 마련됐다. 입관은 6일 오전 11시, 발인은 8일 오전 6시다.
리 교수는 8일 수원 연화장(031-218-6500)에서 화장식을 가진 뒤, 광주 5·18 국립묘지에 영면하게 된다.
다음은 리 교수 장례위원회 주요인사 명단이다.
◇장례위원장
▲고은, 백낙청, 임재경
◇고문
▲김병익, 김윤수, 김주영, 김중배, 명진, 백기완, 손학규, 송기인, 신경림, 오종열, 이재정, 이정희, 이해동, 조승수, 한승헌, 함세웅 외 42명
◇집행위원장
▲고광헌, 박우정, 김영훈, 남윤인순
◇부위원장
▲곽병찬, 김영호, 류이근, 양창근, 우장균, 우희종, 이명순, 이준희, 이창섭, 차재영, 최상재
이날 구성된 장례위원회 측은 장례위원장을 결정하고 장례를 민주사회장으로 4일간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공식 명칭은 '리영희 선생 민주사회장'이다.
장례위원장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고은 시인, 임재경 초대 한겨레신문 부사장이 공동으로 맡기로 했다.
장례위 고문에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이름을 올렸다. 정치계에서는 민주당 손학규 대표와 민주노동당·진보신당·국민참여당·창조한국당 등 야5당 대표들이, 재야계에서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등이 포함됐다.
종교계에서는 명진 스님과 송기인 신부 등이 고문으로 위촉됐다. 예술·문학계 인사들로는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시인 신경림씨, 문학평론가 김병익씨 등이, 법조계에서는 한승헌 변호사 등이 고인의 가는길을 배웅한다.
한편 빈소는 서울 신촌 연세 세브란스 병원 특1호실에 마련됐다. 입관은 6일 오전 11시, 발인은 8일 오전 6시다.
리 교수는 8일 수원 연화장(031-218-6500)에서 화장식을 가진 뒤, 광주 5·18 국립묘지에 영면하게 된다.
다음은 리 교수 장례위원회 주요인사 명단이다.
◇장례위원장
▲고은, 백낙청, 임재경
◇고문
▲김병익, 김윤수, 김주영, 김중배, 명진, 백기완, 손학규, 송기인, 신경림, 오종열, 이재정, 이정희, 이해동, 조승수, 한승헌, 함세웅 외 42명
◇집행위원장
▲고광헌, 박우정, 김영훈, 남윤인순
◇부위원장
▲곽병찬, 김영호, 류이근, 양창근, 우장균, 우희종, 이명순, 이준희, 이창섭, 차재영, 최상재
- 강정순 2010.12.06 20:08
[오마이뉴스 김지영 기자]
지난 50년에 걸쳐 선생이 남긴 연구와 집필의 힘은 아직도 건재하다. 지난 민주정권 10년 동안 이루었던 형식적인 민주주의마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불과 3년을 보내는 지금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민생, 인권, 통일, 경제. 어느 부분 하나 정의와 공정을 논하기조차 부끄러운 현실이 되었다. 더군다나 노동자의 삶은 또 어떠한가.
1970년 11월 13일, 법에 명시된 근로기준도 지켜지지 않는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일깨우기 위해 전태일은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다. 2010년 11월 20일 울산 현대자동차의 하청 노동자 황인하씨가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다. 정확하게 40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노동자들의 핍박받는 삶에는 변화가 없었다. 대다수 서민과 노동자들에게 이 나라는 여전히 동토의 땅이다.
더구나 이 정권이 들어서고 전쟁세대를 필두로 한 극우 반공주의 세력이 사회 모든 분야에 걸쳐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며, 정권을 반대하면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자유당 유신정권 말기의 프로파간다를 일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시대의 참 스승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이 때 선생의 죽음이 남기는 슬픔은 그래서 더 가슴 아픈 통한이다. 이성의 논리에 우상을 덮어 씌우려는, 권력에 빌붙은 지식인들이 활개를 치는 불의의 현실이 계속되는 한 선생의 유지는 뼈아프게 유효한 것이 된다.
선생은 이명박 정권 집권 2년을 앞둔 2005년 3월, < 대화 > 를 출간하며 이런 당부를 남겼다.
"지난 세기 그 흉악한, 불행한 세대를 살아 온 나를 비롯한 선배들이 포함된 앞 세대들이 가꿔온 나무에 달린 열매를 지금 세대들은 아무 생각없이 따 먹고 있다. 누가 씨를 뿌렸는지, 나무가 커 오는 과정에서 어떤 고난을 겪고, 얼마나 많은 피눈물이 거름이 됐는지 생각 하지 않고 열매를 당연한 것처럼 취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그런 젊은이들도 다음에 오는 세대에게 뭔가를 남겨야 하는 '생명의 원리'를 깨우쳐야 한다. 단지 열매만 취하기보다는 그 옆에다 나무를 심고, 꽃을 심어 더 크게 자라고, 더 예쁘게 피게 하는 노력을 해야지. 그래야 '생명의 연속성'이 보장되는 것이고."
선생의 고단했던 삶이 단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한 때 우리가 누렸던 민주주의의 시대를 가능하게 했다면 민주주의가 위태로운 지금 이 시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선생의 분명한 말씀인 것이다.
선생님의 '삶의 흔적' 위에 희망의 불씨를 지피자
2005년 4월 15일 < 대화 > 출간 기념 독자와의 대화가 끝난 후 선생의 친필사인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눈에 보이게 떨리는 성치 못한 오른손으로 평생 글을 써왔던 만년필을 꼭 쥐고 글씨는 휘어지지만 또박또박 선명하게 선생의 이름을 적어주던 모습이 생생하다.
길게 줄을 서서 사인을 받는 사람들 중에 누군가는 시대의 거름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선생은 온전치 못한 가운데도 있는 힘을 다해 모든 사람들에게 이름을 꾹꾹 눌러 써주시는 것으로 그런 마음에 대한 고마움을 대신했을 것이다. 그 때 이름 석 자 쓰는데 입술이 앙다물어지던 선생의 억센 표정을 나는 잊지 못한다.
형식적 민주주의조차 탄압받는 시대. 하지만 죽음은 선생이 살아온 흔적까지 지우지는 못한다. 우린 또 그 흔적 위에 희망의 불씨를 지필 것이다. 그리고 또 다시 누군가는 흔적이 되고 또 누군가는 불씨가 될 것이다. 다 선생이 남기신 위대한 유산이다. 죽은 그가 결코 죽지 않았음을 이제는 우리가 증명해야 할 차례다.
지난 50년에 걸쳐 선생이 남긴 연구와 집필의 힘은 아직도 건재하다. 지난 민주정권 10년 동안 이루었던 형식적인 민주주의마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불과 3년을 보내는 지금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민생, 인권, 통일, 경제. 어느 부분 하나 정의와 공정을 논하기조차 부끄러운 현실이 되었다. 더군다나 노동자의 삶은 또 어떠한가.
1970년 11월 13일, 법에 명시된 근로기준도 지켜지지 않는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일깨우기 위해 전태일은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다. 2010년 11월 20일 울산 현대자동차의 하청 노동자 황인하씨가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다. 정확하게 40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노동자들의 핍박받는 삶에는 변화가 없었다. 대다수 서민과 노동자들에게 이 나라는 여전히 동토의 땅이다.
더구나 이 정권이 들어서고 전쟁세대를 필두로 한 극우 반공주의 세력이 사회 모든 분야에 걸쳐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며, 정권을 반대하면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자유당 유신정권 말기의 프로파간다를 일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시대의 참 스승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이 때 선생의 죽음이 남기는 슬픔은 그래서 더 가슴 아픈 통한이다. 이성의 논리에 우상을 덮어 씌우려는, 권력에 빌붙은 지식인들이 활개를 치는 불의의 현실이 계속되는 한 선생의 유지는 뼈아프게 유효한 것이 된다.
선생은 이명박 정권 집권 2년을 앞둔 2005년 3월, < 대화 > 를 출간하며 이런 당부를 남겼다.
"지난 세기 그 흉악한, 불행한 세대를 살아 온 나를 비롯한 선배들이 포함된 앞 세대들이 가꿔온 나무에 달린 열매를 지금 세대들은 아무 생각없이 따 먹고 있다. 누가 씨를 뿌렸는지, 나무가 커 오는 과정에서 어떤 고난을 겪고, 얼마나 많은 피눈물이 거름이 됐는지 생각 하지 않고 열매를 당연한 것처럼 취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그런 젊은이들도 다음에 오는 세대에게 뭔가를 남겨야 하는 '생명의 원리'를 깨우쳐야 한다. 단지 열매만 취하기보다는 그 옆에다 나무를 심고, 꽃을 심어 더 크게 자라고, 더 예쁘게 피게 하는 노력을 해야지. 그래야 '생명의 연속성'이 보장되는 것이고."
선생의 고단했던 삶이 단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한 때 우리가 누렸던 민주주의의 시대를 가능하게 했다면 민주주의가 위태로운 지금 이 시대,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지에 대한 선생의 분명한 말씀인 것이다.
선생님의 '삶의 흔적' 위에 희망의 불씨를 지피자
2005년 4월 15일 < 대화 > 출간 기념 독자와의 대화가 끝난 후 선생의 친필사인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눈에 보이게 떨리는 성치 못한 오른손으로 평생 글을 써왔던 만년필을 꼭 쥐고 글씨는 휘어지지만 또박또박 선명하게 선생의 이름을 적어주던 모습이 생생하다.
길게 줄을 서서 사인을 받는 사람들 중에 누군가는 시대의 거름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선생은 온전치 못한 가운데도 있는 힘을 다해 모든 사람들에게 이름을 꾹꾹 눌러 써주시는 것으로 그런 마음에 대한 고마움을 대신했을 것이다. 그 때 이름 석 자 쓰는데 입술이 앙다물어지던 선생의 억센 표정을 나는 잊지 못한다.
형식적 민주주의조차 탄압받는 시대. 하지만 죽음은 선생이 살아온 흔적까지 지우지는 못한다. 우린 또 그 흔적 위에 희망의 불씨를 지필 것이다. 그리고 또 다시 누군가는 흔적이 되고 또 누군가는 불씨가 될 것이다. 다 선생이 남기신 위대한 유산이다. 죽은 그가 결코 죽지 않았음을 이제는 우리가 증명해야 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