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트

아기 다람쥐

강정순 2007. 3. 19. 07:03

                                           

          

 

길가에는 코스모스꽃이 한창이었습니다. 어느새 가을이 성큼 다가선 것입니다.
- 아침에는 경춘가도를 탔으니 갈 때는 좀 다른 길로 해서 가 봐요.
우리는 백운계곡으로 가는 고개를 넘기로 했습니다. 나즈마한 산들은 하늘에 닿아 있고 심어 가꾼 곡식들은 풍요로움이 넘쳐났습니다. 구불구불한 시골길에 하나도 바쁠 것 없는 토요일 오후의 귀경길. 그랬는데 맞은 편 도로에서 추월을 시도하는 레미콘 트럭이 있었습니다. 이런 도로에서 추월이라니, 나는 전조등을 번쩍 비추었는데 트럭 운전사는 추월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내 쪽 차선으로 오는 차를 순간적으로 피한다고 피했습니다. 뒷자리에 앉아 있는 딸애의 비명소리도 잠시, 차는 논 속으로 박히고 말았습니다.
- 괜찮아요? 여보 괜찮아?

그러면서 딸애를 보니 눈을 뜬 채로 혼절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119 구급차의 도움으로 가까운 병원에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대학 병원으로 가보시지요.
만혼에 어렵게 얻은 아이인데 말을 못하다니 우리는 서울로 돌아와 3일간의 종합검진을 받았습니다.
- 갑자기 심한 충격을 받으면 언어장애가 오는 수가 있습니다. 회복여부는 글쎄요. 이것은 마치 잘 꿰어놓은 구슬이 한 순간 흩어진 것이나 같습니다. 본인이 꿰 맞출 수 없다면 누군가 옆에서 꿰 맞춰 주어야 하겠지요.

- 애는 내가 돌 볼 테니 당신은 너무 매달리지 않는 게 좋겠어요.
휴직계를 냈습니다. 못 듣고 그래서 말을 하지 못한다는 건 이해가 가는 일이었습니다. 듣고도 말을 하지 못한 것은 딸애나 우리나 모두 힘든 일이었습니다. 유아원에서도 난색을 표했습니다. 놀이터에서도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 안되겠어요, 이곳에선 안되겠어. 애를 데리고 시골로 가야겠어요.
시골에는 묵혀진 논과 밭이 있었습니다. 수도꼭지는 한참을 바람소리를 내더니 녹물을 쏟아냈습니다. 전기 계량기는 10년 전에서 멈춰있었습니다. 벽지를 바르고 나자 비로소 거처다워졌습니다.
남편은 첫눈까지 안고 왔습니다. 우리는 저녁식사 뒤에 마당가 은행나무 아래 돌상(盤石) 가에서 나뭇가지를 지피며 술도 한잔 마주했습니다.
딸애는 내 무릎에 기대어 잠이 들고 눈은 조금씩 더해갔습니다.
- 재워야겠어요.
- 그러지.
낯선 잠자리를 의식하지 않고 딸애는 곱게 잠을 자고 났습니다.
- 나가보렴, 간 밤 눈으로 까치가 얼어있는지
딸애를 앞세우고 나가 보니 눈은 발자국을 남기기 좋을 만큼 내려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요? 치우지 않고 둔 자리에 남겨놓은 호두며 땅콩이 없어졌습니다.
무슨 발자국이었을까? 담장으로 이어진 작은 발자국. 그런데 그것은 다람쥐였던 것입니다. 딸애가 가져다 놓은 먹이는 그 때마다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습니다. 마치 잘먹었습니다 라는 듯이.
남편은 주말이면 내려와서 머물다 갔습니다. 딸애는 남편이 가져온 먹이로 다람쥐와 낯을 익히며 겨울을 나기 시작했습니다.

봄이 오려는가. 개울가 실버들에 물이 오르기 시작할 무렵, 먹이가 그대로 남아 가기 시작했습니다. 딸애의 걱정스런 눈빛을 보는 나도 까닭을 알 수 없었습니다. 들짐승의 먹이가 된 것은 아닐까?
완연한 봄이 왔습니다. 우리는 연곡사로 나들이를 갔습니다. 그곳은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殿閣(전각)이 있었습니다. 나는 현판을 올려다보며 외할아버지도 이 건물을 지을 때 여기 계셨다고 일러주었습니다.
- 언젯적 일이야?
무슨 말소리가 들린 것 같았습니다. 중학교 때라고 이야기를 하려다 딸애를 돌아보니 작은
손이 가리키는 곳에 산 다람쥐가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 다람쥐다!

우리는 서로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것은 분명 딸애의 말문이 터지면서 나오는 소리였던 것입니다.
- 뭐라고 그랬어? 다람쥐라고 그랬니?
아이를 끌어안고 남편이 볼을 비비고 있는 사이 나는 법당을 향해 한없이 觀音(관음)을 찬탄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우리에게 또 한번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당가 은행나무 아래 돌상(盤石)에는 새끼를 데리고 나온 어미 다람쥐가 귀를 쫑긋 세우고 먹이를 나르고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