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순 2006. 12. 4. 19:12

 

 

 

 

                      꽃신

 

 

 

1
제각祭閣 거리 밀밭보리 난리통에 다 짓이겨 난 뒤
어디서 총각 하나 우리 동네로 흘러 들어와
당산堂山나무 아래에서 긴 여름 핼 눈맞추더니
그 중 고르고 골라 솟을대문 우뚝한 집에다 몸 정해 두고
일곱 가마 상머슴질을 한 문중門中 여씨呂氏
일제日製 안경 끼고 전답田沓 보던 주인어른 말고는
여센이라 불렀는디
칠십 가구 동네 사람들 다 여센이라 불렀는디
여학女學 나온 그 집 딸만 보씨요라고
그 해 백중百中 하루 쉬는 머슴장날 굿도 보고
그러고도 남는 돈으로 구루무 한 통 사서 준 것이
그날부터 딸 속에는 여씨呂氏가 살아 낭군처럼 매인 창틀
여씨呂氏가 살아 읍내邑內 선생 군청 서기 다 마다고선
혼자서 시름시름 가슴앓일 해대는 걸 그는 알아서
지체 높은 집안은 사랑 정情도 비끼는가
사주단자四柱單子 여덟 글자 맞춰 영천寧川 이씨李氏 맞는 날
군불 때라 장작 패는 여씨呂氏 팔뚝 심줄이 왜 울뚝불뚝한지는
첫밤 치를 신부나 알 수밖에
연지곤지 머리얹는 건너방까지도 뚝딱거리는 걸
사람들은 오늘 따라 불알시계 소리 유별나다 해쌌는디
불 꺼지고 스르르 예장禮裝을 벗을 적에
놀랜 신부 엎쳐 메고 동네 밖으로
사람들 불불불 횃불을 들고 뒤밟는다
귀밑머리 냄새는 백중날 제가 사준 그 구루무
그 냄새에 취해서 머문 강모래
동네 청년들 연놈 잡아 광에 들일 땐
자기들 탐도 못낸 한恨도 담아서
이놈이 차고 저놈이 밟고 해서 묶인 곳
남들 다 자는 신 새벽 주인 마님이
엽전꾸러미에 비녀 반지 같이 넣어서
쥐도 새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 살아라

2
멀리는 못 가고 품어 살 적 볕이 고와서
그 볕에서 몸푼 아낼 부를 때도 여보 고운 어미
드렁 치고 콩 심고 소도 잡아 짧은 해 긴 밤에는
칡소쿠리 엮어 나간 화개花開장
풍월 읊듯 노래하던 고운 꽃신을
사준 뒤엔 신지 않고 올려 놓더니
바라보면 늦봄 해는 길기도 하여
풀때죽 가지고는 해만 길어서
동네 사람 말 듣고 대신 나선 길
징용가 올 때까지 먹여 주고 입혀 주고
두 마지기 몫 준대서 석삼년 지나왔더니
그 새를 못 참고 고운 어미는
금광 찾아 떠도는 서울 사람 따라서
바람처럼 구름처럼 나가 버린 뒤
다섯 나이 고운이가 갈킨 곳에는
자리가 비어 있는 선반 위 꽃신
죽어도 꽃신만은 안 사주기로 장바닥 꽃신들 비껴가는디
고운이 가슴은 무얼 닮아서 커가면서 저리도 벌렁대는가
열여섯 제 나이대로 따든 자운영紫雲英
꽃 고운 줄은 저도 아는지
읍내 갈 때 신을 꽃신 사달라고
제미처럼 될까 싶어 너 더 크면 이담에 사 준댔더니
제 어미가 갔을 길가 동구 밖 길을
야삼경 제 발로 마져 나가며
돈벌어서 꽃신 사 신고 온다고

3
이제나 올란가 저제나 온가
돈 못 벌어 신 못사니 그래 못온가
그런 갑다 신 못사니 고운이 못오는갑다
산골 사람들 미쳤다 그래쌌는디
털털털 살림가지 털어 버리고
꽃신 사들고 봇짐 싸서 떠나는 여씨呂氏
강원도 충청도 골골 경상도
이 놈의 남도南道길은 목이 길어서
어둑해진 주막거릴 찾아들 적에
숨차고 나이 차 폭삭 늙은이
입가에서 여씨呂氏 혼자 뱅뱅 머물다만
소리소리 흰소리 낡은 목소리
누구 우리 고운이 못보셨다요
오늘도 파장 공친 하루를
색시들 다 거두고 닫으련 문가
와서 탁주 한잔 하고 간단 양반을
이 집에서 제일로 천賤해 빠진 애 적선積善하듯 다가와
잔 채우는 데
이 애가 누군가 ... 이 노인이 누군가
제 딸인 줄 모르고 온갖 잡雜놈들
다 붙여주던 주모酒母가
철난 듯이 알아보는 여씨 봇짐 위에
동그마니 올려 있는 꽃신 한 켤레